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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양지마을의 폭행·감금·암매장”…지옥은 곳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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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시설 ‘양지마을’ 탈출자 증언
납치·폭행·암매장 등 놀라운 얘기
지역언론 “유사한 소문…취재 한계”
인권단체·국회의원 등 조사단 꾸려





한겨레

1998년 사회복지시설 ‘양지마을’에서 수용자들을 상대로 폭행·감금 등 광범위한 인권유린이 일어났다. 철창에 잠금장치가 돼 있는 생활실 모습. 인권운동사랑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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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오랜 시간이 흘러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사건이나 장면들이 있다. 내게는 1998년 7월에 진행했던 ‘양지마을’ 인권유린 조사 과정이 그렇다.



양지마을에서 탈출한 박아무개씨가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던 인권운동사랑방에 온 것은 그해 7월10일이었다. 동국대 학생들이 놀이터에서 술 마시고 있는 박씨를 발견하고 우리 단체로 데리고 온 것으로부터 양지마을 사건은 시작되었다.



박씨는 온몸이 긁히고, 찢긴 상처투성이였다. 그 상처들을 치료도 받지 못하고 방치해 놔서 고름이 차 있었고, 썩어들어 가는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한밤중에 쇠창살 사이로 몸을 빼내서 담을 넘고 산속을 정신없이 달리다가 난 상처들이었다. 그를 씻기고, 밥을 먹인 다음 날부터 나는 그의 증언을 들었다. 그의 증언 자체는 경악할 만한 내용이었다. 대전역, 조치원역, 천안역 등에서 사람을 납치하고, 그들을 폭행하다가 사망에 이르면 개미고개라는 곳에 암매장하고, 여성들은 불임시술을 하고, 강제노역을 시킨다고 했다. 군대처럼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이란 계급을 부여하고, 시설장의 말을 잘 들으면 여자와 합방도 시켜준다는 그런 얘기를 믿을 수 없었다.



노재중 이사장 운영한 사회복지시설
쇠창살 갇힌 채 조사단에 “살려달라”
밧줄·채찍 등 인권유린 현장 드러나

양지마을 수용자들 탈시설 뒤 노숙
지옥 탈출해도…‘복지대책 부족’ 문제
폭행·사망 의혹 암매장지 조사도 미비
복지시설 곳곳 인권유린 사건 속출





양지마을 탈출자의 증언





그래서 나는 박씨를 앉혀놓고 의심나는 대목을 하나하나 확인해갔다. 그에게 그곳 시설에 대한 그림도 그리게 했다. 그의 진술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조치원까지 내려가 지역 신문의 함아무개 기자도 만났다.



“그분의 증언이 무척 구체적이네요. 이분이 말하는 게 사실일 겁니다. 이런 소문이 들려서 취재하려고 했는데,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서 양지마을은 교도소와 같은 높은 담이 설치되어 있고, 철문 세개를 통과해야 그곳에 수용된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에 들어갈 수 있다고도 확인해주었다. 박씨의 말이 지어낸 얘기가 아닌 사실임을 확인하는 순간, 다음 순서를 생각했다. 인권운동사랑방과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들로 조사단을 구성했다. 거기에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이성재 국회의원의 도움을 받기로 했고, 정신과 의사로 유명했던 김병후 원장도 동행하기로 했다. 한국방송(KBS)과 한겨레 등의 언론사들도 따라붙었다. 나는 이 조사를 ‘햇볕 작전’이라고 명명했다.



1998년 7월16일 오전 7시경, 새벽 조치원에 집결한 40여명 되는 조사단과 취재진은 각자의 차에 타고 양지마을로 향했다. 채 해도 뜨기 전에 시설을 급습한 것이었다. 눈앞에 교도소 담장만큼이나 높은 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회의원이 있으니 근무자가 철문을 땄다. 그러자 40여명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정문을 통과했다. 다시 중간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군대 막사 같은 곳이 나왔다. 핏기 없는 얼굴의 남자들이 쇠창살 질러진 창에 얼굴을 내밀고 들이닥친 우리를 내다봤다. 막사로 들어가는 문은 밖으로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고,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밖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쇠창살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우리에게 하소연했다.



“제발 우리를 집에 가게 해주세요. 여기는 지옥입니다.”



“여기는 감옥보다 더해요. 형기가 없어요. 죽어야 나갈 수 있어요. 문 좀 열어 주세요.”



열쇠를 갖고 오게 해서 막사 문을 따고 들어갔더니 영락없는 군대 내무반 구조였다. 양옆으로 나무로 된 침상이 있었다. 그런데 문 입구에는 쇠창살이 질러진 방이 두개가 있었는데, 그곳에 밧줄과 채찍 같은 게 걸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지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도구들이었다.



이 지옥의 주인은 노재중이란 자였고, 그와 그 가족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천성원이라는 사회복지법인을 운영했고, 대전과 이곳 충남 연기군 전동면(현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에 양지마을, 송현원, 요양원 등 세개의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노재중과 양지마을 직원들의 방해가 있었지만, 이성재 의원의 요청으로 경찰이 나왔고,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양지마을과 송현원에서 당장 나가고 싶은 이들의 의사를 확인했다. 그러자 20명 넘는 사람들이 희망했다. 버스를 급히 구해서 그들을 시설에서 데리고 나왔지만, 당장 어디로 갈 곳이 없었다. 대전에 있는 가톨릭농민회관에서 이틀 밤을 지내면서 그들을 면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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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사회복지시설 ‘양지마을’을 운영했던 노재중 이사장(시계방향 세번째)이 인권유린 실태 조사단에 항의하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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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나갈 수 있는 곳





서울로 올라와서도 그들을 수용할 수 없으니, 가족들과 연락이 닿는 사람들은 가족들에게 인계했지만, 갈 곳 없는 사람들은 사무실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한달 반 동안을 사무실에서 밥을 해 먹였다. 그러면서 그들이 양지마을에 들어가게 된 경위와 그곳에서 당한 인권침해에 대해서 보강 조사를 벌였다. 얼마나 맞았는지 몸에 난 상처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한 여성은 등짝 전체에 매를 맞은 자국이 선명한 경우도 있었다.



“맞아서 기절한 사람을 보았어요.”



“죽은 사람을 개미고개로 가서 묻었습니다.”



그들의 진술을 정리해서 민변, 인권운동사랑방, 천주교인권위 이름으로 노재중 등 관련자들을 특수강도, 특수감금, 강도치상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이 사건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검찰이 전국의 부랑인 수용시설에 대한 내사를 진행하고, 양지마을 사건 관련자들도 구속 수사했다. 그렇지만 검찰은 적극적인 수사를 하는 게 아니라 가장 약한 혐의를 적용해서 기소했다. 국가보조금 횡령 같은 죄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들이었다. 결국 노재중은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 범죄에 비하면 너무도 약한 형벌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회복지시설장에 대한 처벌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보건복지부는 시설장을 교체하고, 운영 주체도 바꾸었다. 양지마을에 수용되어 있던 400명 중 대부분이 시설을 나왔고,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은 인권운동사랑방으로 찾아왔다. 당장 생활할 곳이 없으니까 잠시만이라도 사회복지시설에 들어가 있으면 대책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시설에 입소하는 것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양지마을에서의 고통스러운 경험 때문이었다.



“하루를 살더라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들의 주장을 꺾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한정 그들을 돌볼 수도 없었다. 탈시설한 사람들이 갈 곳이 없었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노숙인이 되었다. 그들은 종종 내게 찾아와 밥 먹게 돈을 달라고 했다. 나는 가난했지만, 어떻게든 그들에게 돈을 만들어 쥐여줬는데, 그들은 그 돈으로 술부터 샀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식당에 데리고 가서 밥부터 먹인 다음에 돈을 주고는 했다. 사람들은 떠나갔고, 시간이 흐르면서 연락은 끊겼다. 들리는 소문으로 거리에서 죽었다는 얘기들이 들렸다.







유해발굴도 못한 암매장지





이 사건을 거치면서 고민이 많았다. 그들을 지옥 같은 시설에서 데리고 나온 것은 잘했는데, 그 뒤를 준비하지 못한 점에 대한 후회가 일었다. 미리 준비한 뒤에 시설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나왔다면 그들이 거리에서 노숙인으로 살다가 죽어가는 일은 막을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후회다. 그리고 그때 양지마을에서 폭행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암매장한 개미고개 무덤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일이 두번째 후회였다. 나중에 개미고개의 무덤들을 찾아가 봤지만, 찾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개미고개의 무덤들을 조사하고, 유해를 발굴하고 가족들을 찾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봉분도 제대로 없던 무덤들이 지금도 종종 기억이 난다.



그 사건 뒤에 양지마을의 담은 허물어졌고, 법인도 천성원에서 분리하여 이화사회복지법인이 되었고, 양지마을은 금이성마을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시설은 여전히 노재중 가족들이 운영하고 있다.



다음 해인 1999년 여름, 장애인운동가 박경석씨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사무실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에 있었으므로 그를 사무실로 오게 할 수 없었다. 성균관대 근처의 논장 서점에서 그를 만났다. 그로부터 나는 다른 사회복지시설 에바다 사건에 끌려들어 갔다. 지옥은 곳곳에 있었고, 그 지옥에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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