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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과 위증교사에 대한 1심 판결의 결과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흡사 두 동강이 난 것 같은 느낌을 멀리서도 받는다. 정적을 완전히 제거하는 ‘사법살인’이라는 비판부터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날카롭게 맞서고 있다. 정치의 하수인이 된 사법부를 질타하고, 정치로부터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사법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지만, 판결의 결과에 따라 희비가 갈리기도 한다.
법과 정치의 긴장관계를 보여주는 이런 모습은 사실 어느 사회건 존재한다. 법은 시민의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으로서 이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서술되어야 하고, 정의와 효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몽테스키외는 법은 판결로 말한다고 해서 판결은 ‘법의 입’(la bouche des lois)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내린 판결이 법의 본성에 어긋났다고 인정하는 판사는 거의 없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정치인들도 그들의 정치행위의 자유를 제한하는 판결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떻든 법과 정치의 상호관계가 한국 사회에서 현재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이번 두 판결은 보여주었다. 물론 1959년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형사건이나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처럼 극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차기 대권 경쟁에서 가장 강력한 야당 후보가 피선거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는 판결이 일단 나왔기 때문에 많은 파문을 낳았다.
무엇보다 검찰의 기소에 이르는 과정과 판결의 내용 그리고 양형의 기준이 우선 논란의 핵심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법적 판단이 나올 수 있는 정치사회적 환경에 대한 반성과 함께 ‘애송이 판검사’에 의해 막중한 국사가 어이없이 휘둘리고 있다는 비난이나 한탄보다는 법조인의 양성 과정이 안고 있는 문제에 관해서도 관심을 돌려야 한다.
근대 행정법의 창시자인 프리츠 플라이너(1867~1937)는 “민주주의에서 헌법과 법의 마지막 보루는 재판관이다. 그들에 대한 믿음 위에 법적 안정성에 대한 감정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이번 판결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논거로 곧 이해되어선 안 된다. 신이 아닌 인간인 판사가 오판을 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민주적인 법치국가의 테두리 안에서만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와 법 그리고 민주·법치주의
그렇다면 ‘군부 독재’라는 그동안 익숙해진 단어 대신에 왜 ‘검찰 독재’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 나돌고 있는가. 미국에서 사회적 소수자 보호를 위한 적극적 판결을 내렸던 연방대법원을 향해 보수적 두뇌집단인 헤리티지 재단의 이사장이었던 에드윈 퓰러는 ‘사법 독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칠레의 피노체, 스페인의 프랑코, 포르투갈의 살라자르 독재체제 아래서 절대적 권력의 하수인으로 정치적 반대자들을 고문하고 불법 처형을 정당화했던 검찰을 겨냥해서 1970년대에는 ‘검찰 독재’(prosecutorial dictatorship)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이와 달리 1990년대 말 이탈리아에서는 ‘검찰공화국’(Repubblica dei magistrati)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는데 당시 부패한 정치권을 대상으로 해서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를 비롯한 검사팀 ‘깨끗한 손’(Mani Pulite)이 사정의 칼날을 들이대어 부패한 정치인들을 구속했다. 이를 계기로 정치의 중심축이 사법기관 쪽으로 기울이자 이를 비판하는 쪽에서 검찰공화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지금 한국 상황을 검찰공화국이라고 부를 때는 이런 맥락의 차이에 주의해야 한다. 또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야기되는 검찰 독재의 의미도 위에서 지적한 칠레, 스페인, 포르투갈의 경우와 다르다.
어떻든 사법 독재와 검찰 독재는 학술 용어로서 아직 정착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법, 검찰 그리고 독재라는 개념이 조합되었기에 이를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다. 검찰 독재는 검찰이 특정 정치세력이나 인물에 대하여 과도한 수사와 기소를 통해 정치에 개입해서 법의 공정과 중립을 훼손,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위협하는 상태라고 우선 간단히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의에는 정치와 법이 어떠한 관계체계를 맺을 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지켜질 수 있느냐는 질문이 함께 들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사실 간단치 않다. 이와 관련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 나치 독재와 냉전체제를 거쳐 통일을 이루었던 독일에 있었던 이 문제와 관련된 많은 논의를 한국 사회의 맥락 안에서 한번 검토해보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치독일의 최고 공법학자 카를 슈미트(1888~1985)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1927)에서 “정치적 행위와 동기가 시작하는 특별한 구분은 동지와 적의 구별이다. (…) 정치적인 사고와 정치적 본능은 이론적으로나 실제로 동지와 적을 구별하는 능력으로 입증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근대 국가가 지닌 기능의 비밀을 어떤 당위적인 요구에서가 아니라 국가형태와 관련 없이 근본적인 권력유지를 위해서는 - 반드시 소멸시켜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 적이 누군가를 확인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마디로 정치는 법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법치주의와 의회주의를 파괴한 나치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던 한스 켈젠(1881~1973)은 법과 정치의 영역은 서로 엄격히 구별되어야 하며, 기본 규범으로 시작해서 위계질서를 지닌 법의 자율성이 정치나 도덕에 의해 제약될 수 없다고 <법의 순수이론>(1934)에서 주장했다. 나치독일의 패망 후에 독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의 법이론은 1949년에 제정된 서독의 ‘기본법’이 강조하는 의회주의에 스며들었다.
검찰 독재 청산이 그리 힘든 일인가
그러나 그의 이론은 민주 국가에서 당연히 작동하게 마련인 법과 정치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약점을 지니고 있다. 기본적으로 정치는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법을 이용하고 법은 동시에 이 변화의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호 견제와 균형이 깨지면서 이 둘 사이에 주종관계가 생겨 결국 법이 정치의 시녀가 되고, 반대로 정치가 법의 테두리 안에 갇혀서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정치가 갖는 역동성을 잃게 된다.
1966년 기민당과 사민당이 전후 처음으로 대연정을 수립, 사실상 비판적인 야당은 사라졌다. 이 비판의 역할은 ‘68혁명’을 주도했던 ‘원외 반대세력’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위기는 당연히 정치와 법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했으며 기존의 법학적 접근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사회 현실 속에서 이 관계를 해명하려는 철학과 사회학의 시도가 있었다. ‘비판이론’과 ‘체계이론’이 이런 흐름의 대표적인 예였다.
비판이론의 대표적 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1929~)는 기본적으로 법은 민주적 절차의 안정성과 구속력을 보증해야 하고, 정치는 법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정당화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법과 정치의 상호 연결성을 소통적인 합리성과 접목한 그는 법과 정치에서 나온 결정은 자유스럽고 합리적이며 포용적인 담론의 결과물인 경우에만 정당하다고 본다.
하버마스가 ‘심의(審議) 민주주의’의 시각에서 주장하는 규범적인 법과 정치의 이해와 다르게 체계이론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1928~1998)은 법과 도덕은 사회 체계 안에서 부분 체계로서, 법은 합법인가 불법인가, 정치는 권력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양가(兩價)의 코드에 따라 각각 달리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입법과 이의 시행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 둘은 구조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었다고 보는 루만의 기능주의적 시각은 위에서 언급한 법으로부터 정치를 완전히 분리한 켈젠의 법실증주의적인 입장과 구별된다. 또 분석적이고 서술적인 그의 접근 방식은 규범적이고 비판적인 하버마스의 그것과 달라서 두 학자 사이에 많은 논쟁도 있었다.
법과 정치의 관계에 관한 독일학계의 이러저러한 논쟁을 나름대로 정리하는데 슈미트의 결정주의적 법과 정치의 이해가 깊이 스며들어 있는 1972년 유신헌법의 기초 작업에 참여했던, 독일에서 유학했던 법학도들이 문뜩 떠올랐다. 그때로부터 반세기가 지났는데 여전히 검찰 독재라는 말이 나도는 한국의 현실을 뒤돌아보게 된다. 20년 전 나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법과 정치의 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극히 나쁜 형태의 조합의 하나인 검찰 독재의 청산이 그렇게도 힘든 일인가. 다시 묻게 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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