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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김창규의 시선] 흔들리는 명품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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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창규 경제에디터


지난 10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수장 야히야 신와르가 사살된 후,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기습 공격 직전인 지난해 10월 6일 촬영된 폐쇄회로 TV 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에는 신와르가 가족을 데리고 땅굴로 피신하는 모습이 찍혀 있다. 눈길을 끈 건 그의 아내가 검은색 가방을 들고 이동하는 모습이다. 이스라엘은 이 가방이 당시 3만2000달러(약 4400만원)에 달하는 에르메스 버킨백이라고 주장했다. 신와르가 사망 후 아랍권에서 영웅화될 조짐을 보이자 이스라엘은 탈출 영상과 부인의 명품백 등을 공개하며 신와르 깎아내리기에 나선 것으로 추정된다. 명품이 전쟁 지역의 여론전에 동원된 것을 보면 그만큼 세계인의 ‘명품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



불황에도 성장한다던 명품 시장

2년간 고객 5000만 명이 등돌려

가격인상 앞서 고객가치 새겨야

이 때문에 불황에도 명품 시장은 성장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 이상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 9월 ‘영국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168년 역사의 버버리가 실적 부진에 따른 주가 급락으로 런던 증시 대표 지수인 FTSE100에서 퇴출당했다. 이 지수에는 런던 증시 상장사 중 시가총액 100대 대형주가 포함된다. 버버리는 지난해 4~9월 2억2300만 파운드(약 395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지만, 올해 같은 기간에는 4100만 파운드(약 730억원)의 손실을 봤다. 매출의 30%가량을 차지하는 중국 시장이 크게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버버리는 이제 다른 회사의 인수합병(M&A) 먹잇감으로 거론되는 처지가 됐다.

버버리만이 아니다. 루이비통·디올 등을 거느린 최대 명품기업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는 올 3분기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 감소했다. 구찌·발렌시아가 등을 보유한 케링그룹은 3분기 매출이 16%나 감소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7.2%). 에르메네질도 제냐(-7%) 등 주요 명품기업이 줄줄이 ‘마이너스’ 수렁에 빠졌다. 컨설팅 회사 베인앤컴퍼니는 올해 개인용 럭셔리 시장이 3810억 달러로 전년보다 2%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코로나19가 크게 확산한 2020년을 제외하면 2008년 이후 처음으로 감소하는 셈이다. 대표적 이유로 가격 인상과 경제적 불확실성이 꼽힌다.

명품업체는 코로나19 이후 꾸준히 가격을 올렸다. 보통 1년에 한 번 정도 올리던 것을 두세번, 서너번으로 늘렸다. 코로나19 초기엔 각국에서 유동성 악화를 막기 위해 많은 돈을 푼 덕에 시장에 돈이 넘치다 보니 명품 가격이 올라도 소비는 오히려 늘었다. 심지어 매장문이 열리면 미친 듯이 달려가는 ‘오픈런’까지 생겼다. 구하기 어려운 일부 상품은 웃돈이 얹혀 팔리기도 했다. ‘가격을 올려도 살 사람은 산다’는 자신감이 쌓였다. 업체의 배짱은 두둑해졌다. 2~3시간 줄 서게 하는 건 기본이었다. 매장에 입장할 땐 신분증을 제시해야 했고 ‘판매 유보 고객’이라는 명분으로 고객도 가려 받았다. 심지어 매장에서 입장 대기 순번을 받으려는 고객에게 본인은 물론 동행자의 이름·연락처·생년월일 등을 입력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제공하지 않으면 입장을 거부했다. 고객은 ‘왕’이 아니라 사실상 ‘노예’였다. 이를 두고 부유층의 소비를 중산층이 따라 한 ‘밴드왜건’ 효과 덕이 컸다는 분석도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렇게 ‘노예’처럼 굴던 소비자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난 2년 동안 5000만 명의 소비자가 럭셔리 시장에서 빠져나갔다. 이제 소비자는 4억명으로 줄었다. 특히 1997년에서 2012년 사이에 태어난 Z세대에서 명품에 대한 매력이 떨어졌다. 명품 시장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경기 침체로 지갑을 닫는 소비자가 크게 늘어난 데다 가격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는 인식이 커졌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매체 포브스는 “동일한 제품 가격이 3~5년 사이에 거의 두 배로 올랐다는 걸 고객이 쉽게 알아차렸다”며 “많은 고객이 품질 저하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1990년 영화 ‘귀여운 여인’에는 여주인공이 명품 매장을 방문했지만 허름한 옷차림 탓에 직원으로부터 무시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34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일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얼마 전 미국의 방송인이자 유명 인플루언서인 베서니 프랭클은 시카고의 한 명품 매장을 방문했다. 땀에 젖은 평범한 티셔츠를 입은 그는 예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당했다. 하지만 다음날 검은색 명품을 차려입고 방문하니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명품은 시대를 초월한 클래식한 작품을 가진 아름다운 브랜드”라면서도 “모든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고객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도 시대를 초월하고 클래식한 가치”라고 꼬집었다. 명품업체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앞으로 더 많은 고객이 등을 돌리기 전에.

김창규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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