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8 (목)

[이철재의 전쟁과 평화] 노조보다 김정은에게 충성을 바쳤던 노조 간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앙일보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국방선임기자


“‘촛불민심은 장외집회에 응답하라!’ ‘촛불이여, 바다가 되자!’ ‘주권자 힘으로 검찰개혁 완수하자!’와 같은 기백 있는 선동 구호들을 많이 내걸어라.”(2019년 10월 26일)

“‘국민이 죽어간다’ ‘이게 나라냐’ ‘퇴진이 추모이다’ 구호를 전면에 내걸고, 역도놈의 퇴진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촛불시위·추모문화제 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라.”(2022년 11월 15일)

지난 6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석모(52) 전 민주노총 국장이 북한 문화교류국으로부터 받은 지령문들이다. 문화교류국은 정찰총국과 함께 북한의 핵심 대남 공작기구로 꼽힌다. 일심회 사건(2006년)·왕재산 사건(2011년) 등이 문화교류국의 ‘사업’이었다. 북한이 석씨에게 지령문을 내려보냈던 때 국내는 각각 조국 전 법무장관 수사와 이태원 참사로 한창 시끄러웠다. 북한이 지시한 ‘퇴진이 추모다’ 등 구호는 공교롭게도 집회에 등장했다. 주최 측은 “스스로 만든 문구”라고 해명했다. 한국 사회에 조금만 틈이 생기면 헤집고 들어오려는 북한의 저의는 털끝을 쭈뼛하게 만든다.



국보법 위반 민노총 국장 중형

4년간 102차례 북과 비밀 교신

촛불집회 구호까지 지시받아

‘전민항쟁’으로 체제 전복 노려

승마광 김정은 위해 말 사육술 요구

중앙일보

지난해 1월 18일 국가정보원이 경찰과 함께 민주노총 전국 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사무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석씨는 2017년 9월 캄보디아에서 북한의 리광진을 비밀리에 만났다. 리광진은 고위 북한 공작원으로 ‘자주통일충북동지회’ 사건(2019년)의 배후 세력이다. 석씨와 리광진은 “20여년 동안 만나 굳게 손잡고 뜨겁게 포옹하며 밤새도록 따뜻한 동지·혈육의 정을 나눈” 사이였다.

이후 석씨는 2018년 10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102차례에 걸쳐 90건의 지령문을 받고 24건의 보고문을 보낸 것으로 공안당국이 파악했다. 사진·동영상·음악 파일 안에 문서를 숨기는 스테가노그래피 수법이나 민주노총 홈페이지·유튜브 댓글로 문화교류국과 통신했다. 정부 관계자는 “예전 난수표 방식은 기껏해야 A4 용지 반장이었는데, 스테가노그래피 덕분에 수십장 분량의 지령·보고문이 휴전선을 넘나든다”고 귀띔했다.

석씨는 ‘총회장(김정은)’과 ‘본사(문화교류국)’의 ‘지사(지하조직)’를 꾸렸다. 하부 조직원은 총책에게만 보고하고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는 ‘단선연계 복선포치’를 엄수했다. 석씨는 “총회장님의 큰 은덕”을 입었다며,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생일마다 충성문을 바친 것으로 공안당국이 판단했다.

석씨는 민주노총의 간부였지만, 정작 민주노총은 그에겐 ‘지사’의 지도를 받는 ‘영업1부’에 불과했다. 그래서 위원장 선거결과 예상, 내부 통신망의 계정·비밀번호 등 민노총의 속사정을 바로 북한에 알린 것으로 조사됐다.

공소장에 따르면 석씨와 종북 지하조직은 북한과 김정은에 충성하는 ‘눈과 귀’와 ‘팔과 다리’처럼 활동했다. 지령문이 내려오면 반정부 투쟁을 벌이고, 반미·반일감정을 부추기며, 총선·지방선거에 개입하고, 군사정보·국가기간망 비밀을 수집했다. 북한이 석씨에게 주문한 정보엔 말 사육 기술도 있었다. 승마는 김정은과 김씨 일가의 값비싼 취미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전민항쟁’을 통한 북한 주도의 통일이라는 게 공안당국의 분석이다. 전민항쟁은 인민군의 총공격, 남북한 민중의 봉기, 빨치산 준동의 총체를 뜻한다. 북한은 또 다른 지하조직인 ‘자통민중전위’에 내려보낸 지령문에서 “진보집권은 선거가 아닌 폭력적 방법의 전민항쟁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대한민국은 미국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선거에 승리해도 미국·군부·보수세력이 탄압한다”고 설명했다.

“개인주의 20~30대 교양사업 강화하라”

북한은 지하조직을 깐깐하게 관리했다. 조직원의 비위 사실이 드러나면 석씨는 ‘본사’에 이를 보고해 징계를 의뢰했고, 통보받을 때까지 해당 조직원의 음주를 금지했다는 보고문도 있었다.

북한은 또 ‘노동운동의 변질’을 우려했다. 앞으로 주력 투쟁세력이 퇴직해 세대교체로 나설 20~30대는 개인주의 문화 풍조에 물들어 계급·단결의식이 부족하고 정치투쟁보다는 일자리·임금인상에만 집착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석씨 지하조직에 계급성과 정치의식을 높이는 교양사업을 실속있게 진행하라고 독려했다고 한다.

공안당국은 전국의 ‘지사’들을 내사 중이다. 그 숫자가 여러 개며, 전체 조직원은 100명이 넘는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은 “김정은은 ‘남북이 통일될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지만, ‘핵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한국 전 영토를 평정하겠다’라고도 다짐했다”며 “‘영토완정’의 기반을 마련하려면 한국 내부에 ‘혁명기지’를 구축해야 한다. 그래서 북한이 대남 공작에 집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정은은 올해 정찰총국 예하 부대를 세 차례 방문했다.

그러나 지하조직을 처벌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수집하기가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이 법정에서 암호키로 통신문을 해독하는 장면을 보여줬지만, 석씨 측 변호인은 “증거 조작”이라고 맞섰다.

지난 13일 ‘적국’으로 한정했던 형법 제98조 간첩죄 적용 대상에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를 추가한 개정안이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의결됐다. 외국 간첩을 옭아맬 수 있는 법이 인제야 만들어진다. 방첩사령부가 기밀 정보를 중국에 유출한 정보사령부 군무원을 적발한 사건이 계기였다. 당시 군무원에게 간첩죄를 적용할 수 없어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해야만 했다. 현재 간첩을 간첩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국이다.

형법 개정안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 체제를 뒤엎으려는 지하조직들은 지금도 암행하고 다닌다. 그런데 올 1월 1일 경찰이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넘겨받은 뒤 8월 현재 국가보안법 위반 검찰 송치는 0건이었다. 국가안보 위해범죄 수사에 당장 손을 대야 하지 않을까.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국방선임기자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