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부친이 강제로 끌려가 모진 노동에 시달렸던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을 다녀온 유족 김광선(82) 씨는 27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사도에서 하고 싶었던 말을 결국 못한 채 돌아왔다"며 이같이 말했다. 사도섬은 김 씨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지만, 절대 고향은 될 수 없는 곳이다. 김씨의 아버지는 가혹한 환경에서 일하다 광산 돌가루에 폐가 다 망가졌고, 가족 역시 평생 고통을 함께 했다.
김 씨를 비롯한 사도광산 한국인 피해자의 유족 9명은 일본의 진정성이 담긴 추도식을 기대하고 지난 23일 사도섬으로 향했다. 그의 50대 딸도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흘 간 김 씨와 함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 지난 7월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합의의 정신을 지키지 않으면서 추도식은 한·일이 나뉜 채 각각 '반쪽'으로 치러졌다. 유족은 바랐던 일본의 강제성 인정이나 사과는 듣지 못했다. 김 씨는 통화에서 "이번에는 정말로 일본이 잘못했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25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 조선인 기숙사 터에서 열린 사도광산 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한국측 유족과 참석자들이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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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유족들은 추도식이 왜 파행됐다고 들었나
A : 마지막 순간에 한·일 간에 조율이 안 됐다고 들었다. 일본이 마치 추도식을 '문화 행사'처럼 진행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그래선 안 된다. 우리는 동참할 수 없고 그러면 우리대로 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우리끼리라도 모여서 추도식을 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앞서 한국은 지난 23일 일본이 주최하는 '사도광산 추도식'을 하루 앞두고 전격 불참을 선언했다. 일본은 이날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력이 있다고 보도된 이쿠이나 아키코(生稲晃子) 외무성 정무관(차관급)을 정부 대표로 보낸다고 통보했다. 이에 더해 한국에 막판에 공유한 추도사에는 조선인 동원 및 노동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대목이나 사과 표현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이 빠진 추도식 식순에서 결국 '추도사'를 제외하고 '인사말'로 대체했다. 김 씨가 일본의 추도식을 추도식이 아닌 '문화 행사'처럼 치르려 했다고 표현한 이유다.
Q : 원래 어떤 마음으로 사도섬으로 향했나
A : 나도 아버지가 사도광산에서 돌을 뚫는 작업을 하며 돈을 버는 동안 그곳에서 태어났다. 다시 돌아가서 일본의 잘못을 지적하고 싶었다. 일본은 우리를 36년 동안 괴롭혔고 우리 부모들이 그곳에서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결국 제대로 된 반성은 없고 이게 뭔가 싶었다.
Q : 한국이 주최한 자체 추도식은 어땠나
A : (박철희 주일 한국) 대사가 써온 것(추도사)을 읽고 각자 기도를 하거나 절을 하고 술을 올렸다. 나는 산이 쩌렁쩌렁 울리게 기도를 했다. 첫 번째 추도식이니 어떻게 우리가 다 만족할 수 있겠나. 그러나 내년에는 (한·일 간에) 더 좋은 합의에 따라 (추도식이) 이뤄져야 하지 않겠나 싶다.
25일 오전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소재 사도광산 조선인 기숙사 터 제4상애료에서 열린 사도광산 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유족이 헌화를 하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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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열린 '사도광산 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도식'의 공식 식순은 10분 만에 끝났다. 추도식 이후 유족들은 관광지로 변한 광산 갱도를 둘러봤다. 갱도는 약 400㎞로, 일본은 이중 두 곳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김 씨의 부친은 1912년생 고(故) 김종원 씨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1940년 충남 논산에서 사도 광산으로 징용됐다.
Q : 부친이 일했던 갱도를 직접 보니 어땠나
A :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사람이 못 들어가도록 폐쇄된 갱도도 많았고, 마치 벌집처럼 떨어져 나간 곳도 있었다. 솔직히 나 혼자 생각으로는 '유네스코에 등재됐다고는 하지만 과연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일하다가 폐가 망가지는 바람에 자식인 나도 동생들을 돌보느라 하고 싶은 공부도 충분히 못 하고 희생됐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사도광산 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유족들이 25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 조선인 기숙사 터에서 열린 추도식을 마친 뒤 갱도를 찾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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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유족들은 전날에는 조선인 노동자 관련 전시 공간이 있는 사도광산 옆 아이카와 향토박물관도 찾았다. 지난 7월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직전 일본은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를 사도광산 '현장에' 반영하라"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권고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해당 전시관을 열었지만, 정작 강제노역을 인정하는 전시물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아 논란이 일었다.
Q : 박물관은 어땠나
A : 전시해둔 것도 얼마 없고 하도 조그마해서 박물관이라고 부르기도 무리였다. 아버지 이름이 남아있지 않을지 샅샅이 찾아봤는데 없더라. 성의 없이 만들어뒀다는 생각이 들었다.
24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광산 인근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내 작은 전시실에서 사도광산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들이 조선인 노동자에 대해 설명하는 패널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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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이번 추도식 파행 사태에서 한국 정부의 대응은 어땠다고 생각하나
A : 솔직히 정부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일정 내내 유족들을 성의껏 대해줬다. 한·일 합의가 안된 건 아쉽지만 정부가 데려가지 않고 유족들이 스스로 가려고 했으면 수백만 원이 들었을 것이다. 가고 싶어도 못 가던 곳을 갈 수 있게 된 점은 감사하다.
한편 일본 정부는 이번 추도식을 위해 한국의 유족들을 초청하면서도 관련 비용을 전혀 부담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비용 전액을 부담한 데 대해서도 관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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