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8 (목)

‘순결 사탕’ 먹어봤나요? [한채윤의 비 온 뒤 무지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전국여성장애인폭력피해지원상담소및보호시설협의회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지난해 9월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성가족부가 성 인권 교육 사업 폐지 방침을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한채윤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한국순결운동본부’가 전국 초중고의 성교육을 도맡았던 때가 있었다. 이 탓에 1998년부터 2000년대 중반 사이에 학교를 다닌 이들에게 성교육이란 정체 모를 사탕을 먹은 기억으로 남았다. 선생님이 주는 ‘순결 캔디’를 먹으면 결혼 전까지는 순결을 지킨다는 서약이 성립한다고 했으니 교육이 아니라 의식에 더 가까웠다. 아니나 다를까 특정 종교 집단이 관여되었음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었고, 금욕 중심의 성교육에 회의감도 커지면서 순결 캔디는 서서히 사라졌다. 하지만 정말 사라졌을까.



2023년 초에 ‘건강한가정만들기운동본부’가 국민의힘 서울시 의원을 찾아가 조례안 하나를 내밀었다. ‘학교구성원 성·생명윤리 규범’이란 거룩한 명칭의 조례안엔 ‘성관계는 혼인 관계 안에서만 이뤄져야 한다’는 규정이 있고, 학생과 보호자, 교직원이 위반하면 학교장에게 제보하도록 했다. 시대착오적이란 거센 비판에 조례 제정은 무산되었지만 20년 전 순결 캔디가 더 커져 돌아온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성교육은 절제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기 때문이다. 낡아 보이는 순결과 금욕 대신 이젠 절제인가.



지난 19일, 유튜브 라이브로 진행된 한국방송 ‘시사기획 창’의 ‘성교육 합시다! 청소년 성교육 끝장토론회’를 보면서 아찔한 기시감을 느꼈다. ‘성경적 성교육’을 강조하던 이들이 나와 학교에서 ‘절제 성교육’을 해야 한다며 유네스코에서 권장하는 ‘포괄적 성교육’은 청소년을 성적 방종으로 이끈다고 비난했다. 절제 성교육이란 청소년에게 파란불일 때 건너가고 빨간불에는 건너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신호등이 초록색일 때 도로를 건너야 하는 것은 맞다. 보행자나 운전자에게 빨간색은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다. 이건 우리 모두의 약속이다. 필요한 건 절제가 아니라 약속의 체계를 이해하고 교통사고를 조심하는 판단력이다. 그래야 신호등이 없는 길도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다. 진정한 교육은 빨간불에 건너면 인생 망친다며 공포심과 불안을 교재로 삼지 않아야 한다.



포괄적 성교육은 ‘절제’의 반대말이 아니다. 포괄적이란 말 그대로 ‘절제’까지 포괄한다. 일평생 살면서 다양한 일을 겪게 되고, 예상치 못한 상황도 만날 수 있기에 연령별로 성장 과정에 맞추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콘돔 사용법을 알려주는 세이프섹스 교육은 성행동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은 임신이나 성병에 전염되지 않을 방법을 알려주고, 만약 준비되지 않았다면 성행위를 안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함을 알게 한다.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이 둘 다 중요한 선택지임을 알고 안전과 건강, 평등을 지키며 판단할 수 있게 돕는다. 또, 절제 성교육자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반대하지만, ‘한국리서치’가 발표한 최신 여론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 국민의 78%는 중고등학교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르쳐야 한다고 답했고, 초등학교에서도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58%가 답했다. 이 정도면 성적 자기결정권이 성교육에 포함될 근거는 명확하다.



성교육 현장이 특정 종교의 입김대로 좌지우지되어선 안 된다. 성경적 성교육이 교회 안을 떠나 모든 시민에게 적용될 조례로 만들어지거나, 모든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공교육의 기준이 되는 것은 곤란하다. 다시 순결 사탕을 먹으며 성교육을 받던 때로 퇴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의 모든 책방, 한겨레에서 만나자 [세모책]

▶▶핫뉴스,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과 함께!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