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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 지붕이 샌다고 아이들이 말한다. 천정에 올라가본다. 깨어진 기왓장 사이로 빗물이 한두 방울 떨어진다. 목사 가운 차림의 여자가 손에 우산을 펼쳐 들고 소리친다, 더러운 빗물이 성전을 더럽히는구나! 누가 대꾸한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물은 더럽지 않다! 대꾸하는 게 누군지 모르겠다. 어수선한 꿈에서 깨어나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인지 떠오르는 생각인지…. “사람 몸이 병들었다고 하지 마라. 몸은 병들지 않는다. 병드는 건 영혼이다. 몸은 상하지 않는다. 상하는 건 영혼이다. 몸은 한님을 등지지 않는다. 한님을 등지는 건 영혼이다. 너는 몸이 아니다. 몸은 하느님 말씀이다. 꼴 없는 로고스다. 꼴 없는 무엇이 어떻게 병들고 상하고 하늘을 등지겠느냐? 몸은 없는 것이고 영혼은 있는 것이다. 지금 네 몸으로 네 영혼이 치유되는 중이다. 걱정마라. 네 영혼이 네 영혼을 고치는 거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듯 말듯 좀 벅차다. 오케이, 생각 그만!
-꿈속에서 꿈을 꾸는지 꿈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 늙는 것이 등산 비슷하다. 나이 들수록 발로 밟을 영토는 좁아지고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안아줄 세상은 넓어진다. 몸은 갈수록 단단하게 졸아붙고 마음은 부드럽게 너그러워지는 그런 늙은이가 나이를 제대로 먹는 거다.” …뜬금없이, 성경은 독자에 따라서 반응이 달라진다고 언제 어디서나 같은 책이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서 삶의 질(質)이 달라진다고 말하면서 당구공을 바닥에 던진다. 어떤 데서는 공이 높이 튀어 오르고 어떤 데서는 거의 튀어 오르지 않는다. 성경과 독자의 거리가 읽는 사람 속이 단단하면 멀어지고 부드러우면 가까워진다는 얘기다. …코미디언이었다가 방송인이었다가 지금은 무슨 회사 사장이라는, 이름이 뭐였더라? 늙은이의 말을 듣는다. “내가 한때 세상에서 이름깨나 알려졌다가 무슨 일로 욕을 무진장 먹고 잠간 유치장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사십일 금식기도를 하는데 그때 미알 기도를 했지. 미알 그게 없으면 거죽만 사람이지 맹탕 허깨비인 거라. 처음에는 사람마다 미알이 있고 나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미알을 달라고 기도했던 건데 알고 보니 그거 없는 사람 없는데 코 없는 사람 없듯이 미알 없는 사람 없는데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게 있는데 내가 그걸 모르고 팽개쳐두었던 거라. 그래서 눈물콧물 쏟으며 엉엉 울고불고 지랄발광을 쳤더니 어느새 세상이 달라졌지 뭔가? 사십일 작정하고 들어갔다가 사십일 안 채우고 중간에 나왔지, ㅎㅎㅎ…” 그의 말을 들으며 같이 웃다가 꿈에서 나온다. 시계를 보니 0시 반. 어제 오후 4시부터 잤으니 아홉 시간을 잔 셈이다. 미알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지만 그런 말은 없다. 미묘한 알(卵)? 글쎄다. 뭔지 모르지만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무엇일 게다. 속이 단단한 사람? 아니, 나이 들면서 속이 텅 비워지는 그런 사람! 저 늙은 성황당 나무처럼. …앉았다가 다시 잠들었나보다. 성당을 새로 지어 축성하는 날, 사람들이 모여든다. 아직 문을 열지 않아서 누구도 들어가지 못한다. 이해인 수녀가 축시를 낭독한다. 잘됐다, 정신 차려 기억했다가 꿈에서 깨어나는 대로 적어두어야지, 생각하는데 성당 문이 열리는 듯 꿈이 흔들리고 어느새 꿈 바깥이다. 아쉽다. 하지만 꿈에서 나오며 얼핏 성당 내부를 본 것 같기는 하다. 없다, 아무것도 없다! 벼락 맞아 속이 시커멓게 타서 텅 비어있는 고목의 그루터기를 잘라 안팎을 정성스레 다듬고 속은 어두운 잿빛으로 밖은 눈부신 황금빛으로 색을 입혔다. 그게 전부다. 누가 속삭여 말한다. “지금은 거울로 보듯 희미하지만 그날에는 얼굴로 얼굴을 대하듯 모든 것이 명징(明徵)하리라.” 그 위에 스승님 말씀이 겹쳐진다. “너희가 지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아멘!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이 무너진 자리에 한님의 성전이 세워지는 거다. 십자가가 왜 해골산에 섰는지 그 까닭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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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깨어나 오줌 누고 방금 꾼 꿈을 생각하는데 전혀 캄캄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음, 꿈을 꾼 건 아는데 무슨 꿈인지는 모른다? 그러면 그건 꿈을 꾼 게 아니지. 없던 일로 치고 잠이나 자자.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니, 누구 맘대로? 라는 듯, 꿈에 본 것이 생각난다. 오래된 병풍인지 족자인지 굵은 몽당붓으로 쓴 글씨를 읽는다. “하느님 아닌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받으려면 너 아닌 네가 받아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네가 알고 있는 하느님 아닌 진짜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받으려면 네가 알고 있는 너 아닌 다른 네가 그것을 받아야 한다. 꿈속에서도 ‘아멘’이라고 한 것 같다. 너도 배고프지만 둘러보면 너보다 더 배고픈 사람이 있다. 그가 너보다 먼저 네 앞에 있는 것을 먹게 하여라.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그럴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바닷가 마을이다. 사시사철 불어오는 해풍의 영향으로 모든 사물이 한쪽을 향하여 있다. 바람 부는 날 해변에 앉아있는 갈매기들처럼, 나무들은 말할 것 없고 집도 창고도 전봇대도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 앉아있는 송아지까지도 모두가 한 쪽을 바라본다. 바라보고 있는 쪽은 낙지 머리처럼 단순하고 반대쪽은 낙지 발처럼 복잡하다. 하나로 비롯하여 여럿으로 마감되고 그 여럿이 하나를 이루는 형상이다. 그런데 어? 저쪽 구석에 무엇이 반대로 있다. 모두가 바라보는 곳을 등지고 모두가 등지는 곳을 바라본다. 그 무엇이 전체를 거꾸로 뒤집어놓는다. “그러니까 이것들 모두 가짜 아냐?” 이 생각인지 말인지가 어디에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그때 보이지 않는 손이 그 무엇을, 그게 뭐였더라? 꿈에서는 분명 알았는데 깨고 나니 모르겠다, 어쨌든 그 무엇을 보이지 않는 손이 들어 올렸다가 거꾸로 둘러앉힌다. 그러자 모든 것이 함께 안정한다. …이쯤에서 꿈을 벗는데 들려오는 한 마디. 인위(人爲)는 하늘을 거스르는 힘이다. 그것이 비워진 자리에 비로소 하늘이 위(爲)한다. 땅인 너를 등져라, 하늘인 너로 사는 길이 거기에 있다. 땅에서 하늘을 우러르지 말고 하늘이 땅을 받쳐주게 하여라. 이것이 본연(本然)이다. …기도가 절로 나온다, 저로 하여금 근사하지만 참이 아닌 사람의 사랑을 졸업하고 무한하고 진실한 한님의 사랑에 입학시켜주십시오. 저에게 그럴 준비가 되어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러고 싶은 이 마음이 진심인 것은 아시잖습니까? 보이지 않는 당신 손으로 저를 제 자리에 거꾸로 돌려 앉혀주십시오.
-점심 먹고 잠깐 누웠더니 흑판에 문자가 나타난다. 1×0=0, 0×1=0, 1÷0=불가, 0÷1=불가, 1+0=1, 0+1=1, 1-0=1, 0-1=-1. 나는 영(零)인 영(靈)이고 너는 하나인 사람이다. 네가 나를 삼켜도 너는 없고 내가 너를 삼켜도 너는 없다. 너도 나도 서로 쪼개지 못한다. 네가 너를 밀폐하여 꽁꽁 가두면 내가 네 곁에 있든 말든 너는 너일 뿐이다. 하지만 죽은 너다. 밀폐 곧 죽음이기에. 내가 영(零)인 영(靈)이듯이 내 자식인 너도 영(零)인 영(靈)이다. 그런 줄 알고 까불든지 풀이 죽든지 맘대로 해라. 대꾸한다, 둘 다 않겠습니다. 어쩔 셈이냐? 까불지도 않고 풀이 죽지도 않겠어요. 됐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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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어떻게 이 한 마디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지난날의 과오를 돌아보고 그것에서 쓸모를 찾는다면 세상에 무엇을 과오라 하겠는가?” 말은 근사하다만 지난날의 과오를 들여다보다가 거기에 빠져서 길을 잃고 만다면 어쩔 것이냐? 이렇게 묻다가 꿈을 벗는다. 동녘하늘 그믐달 바라보며 오줌 한 번 누고 다시 잠든다. …문밖에 누가 왔다. 낯은 익었는데 누군지 모르겠다. 젊은이가 자기 여자 친구와 함께 하룻밤 묵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고는 답도 듣지 않고 방에 들어와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한 마디 한다. “쓸모계약서만 있으면 세상에 쓰지 못할 물건이 없는 거라!” 그러고는 ‘쓸모계약서’라는 걸 요순천일지곡으로 한 바탕 불어제친다. 쓰을…모… 쓰으으으으을…모오오오오… 계에약…게에에에에…야아악… 따라서 부르다가(?) 꿈을 벗는다. …음, 쓸모라! ‘쓸모’라는 단어로 네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냐?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한다.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지만 거기 그렇게 계신다는 것만큼은 모른다 할 수 없는 어머니 한님, 당신이 저를 이 세상에 낳으셨으니 저를 세상에서 당신 좋으실 대로 쓰십시오. 아니 뭐, 아무데도 쓰지 않고 그냥 두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무튼 제가 알아서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쓸모 같은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저로서는 그냥 하루하루가 요천(堯天)이요 순일(舜日)입니다. 아셨지요? 어머니. 당신 자식은 “이상 무!”올시다. 이상(以上) 무(無)냐? 이상(異常) 무(舞)냐? 모르겠어요, 어쩌면 둘 다 아닐까요? ㅎㅎㅎ (함께 웃음).
관옥 이현주 목사
*이 시리즈는 순천사랑어린마을공동체 촌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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