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가 유일한 위안”
북한 당국이 한국 드라마를 봤다는 이유로 10대 소녀에게 수갑을 채우고 체포하는 교육 영상이 지난 9월 공개됐다. /KBS |
한 20대 탈북민이 북한 젊은이들이 당국의 엄격한 한국 문화 단속 등에 대한 불만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고 증언했다.
작년 10월 탈북해 현재는 서울에서 생활 중인 강규리(24·가명)씨는 27일 일본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한국 드라마를 봤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처형하는 김정은에게 충성심은 눈곱만큼도 없다”며 “당국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 것이 우리 세대의 특징이며, 이것이 북한 사회 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강씨는 지난 26~27 인권을 주제로 한 영화 상영 및 강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으로 일본에 방문, 매체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강씨는 당 간부 등 특권층들이 몰려 사는 평양에서 태어나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다, 체제에 불만을 느끼고 작년 10월 탈북에 성공했다. 평양의 한 대학에서 탁구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강씨는 북한 당국이 젊은 세대에서의 남한 문화 확산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고 했다. 강씨는 “길을 걸을 때마다 경찰에게 불려 세워져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에서 ‘오빠’ 같은 한국식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확인당했다”며 “한국 드라마를 시청한 청년들에 대한 공개 재판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지난 9월 북한 당국이 한국 드라마를 봤다는 이유로 10대 소녀들을 수갑 채워 체포하고, 가족 신상까지 공개하며 비판하는 영상이 한국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이 같은 단속에도 북한 내 한국 드라마 인기는 이어지고 있다고 강씨는 설명했다. 강씨 역시 14세부터 한국 드라마를 접해, 현재 ‘겨울연가’ ‘상속자들’ ‘이태원 클라쓰’ 등 웬만한 인기 작품은 모두 시청했다고 한다. 특히 강씨는 가장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로 2018년 방영된 tvN 로맨스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꼽았다. 강씨는 이 드라마는 탈북 전날까지도 계속 시청했다며 “힘든 삶을 버티기 위한 유일한 위안이었던 드라마를 보는 일은 죽어도 멈출 수 없었다”고 했다.
북한 장마당 풍경. /조선일보DB |
강씨는 북한 주민의 열악한 생활을 전하기도 했다. 강씨에 따르면, 당국의 배급이 끊긴 지 오래돼 주민들은 ‘장마당’(시장)에서 생활필수품을 겨우 구입해 살아간다. 강씨는 “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라며 “대학에서도 교수에게 뇌물을 주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강씨는 탈북 당시 상황을 상세히 털어놓기도 했다. 강씨는 부모님과 사업 동료 한명과 함께 엔진이 달린 목조 배를 타고 함경남도에서 탈북을 시작했는데, 북방한계선(NLL)을 넘기 직전 경비정의 추격을 받았다. 다행히 높은 파도와 짙은 어둠 덕에 추격을 피했고, 출항 약 44시간만에 한국 동해안 속초 앞바다에 도착했다. 한국 어민들이 배 위에서 “탈북했습니까?”라고 물었고, 강씨 측이 “그렇습니다”라고 답하자, 어민들은 “잘 오셨습니다”라며 환영해 줬다고 한다.
강씨는 “처음 마주한 한국인의 따뜻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며 “캄캄한 세상에서 빛이 가득한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아 눈부셨다”고 했다.
강씨는 “북한에서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며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같은 민족으로 여기며 도우려 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에 가면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 모른다”라고 했다.
[박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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