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논현동의 서정아트가 지난 15일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The Order of Time'이라는 타이틀로 시작한 전시도 시간성을 다룬 전시다. 오는 12월 24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독일 작가 유르겐 스탁(Juergen Staack·b.1978)과 한국 작가 홍순명(b.1959)이 참여했다.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 2024.11.27 art29@newspim.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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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가의 작품이 갤러리 층마다 교차하며 2인전 형식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유르겐 스탁, 홍순명이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의 의미를 어떻게 직조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획전이다.
전시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이탈리아 태생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b.1956)의 저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The Order of Time'(2017)에서 착안한 것이다. 로벨리는 자신의 저서에서 시간이 순서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전형적인 통념을 전복한다. 그는 시간의 상대성, 비선형성, 개별성을 강조한다.
즉 시간이 원초적 질서가 아니라 사건 간의 관계이자, 그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경험의 양상으로 우리의 인식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제안한다. 꼭 로벨리의 주장이 아니어도 시간은 궤적마다 다른 모습으로 전재하여 그 본질을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이 존재하는 한 시간은 우리의 삶에 뚜렷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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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뒤셀도르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유르겐 수탁은 언어, 이미지의 경계에서 원본에 천착하여 시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서울을 기반으로 작업 중인 홍순명은 하나의 화폭 안에 여러 레이어를 켜켜이 쌓아올려 세대의 기억과 경험이 중첩되고, 사건의 풍경이 혼재되는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두 작가는 시간을 원초적 질서가 아닌, 우리의 인식에 의해 형성된 경험의 양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공통점이다.
유르겐 스탁은 이번 전시에서 살아있는 생명체인 '꽃'과 시간에 따라 기울기가 달라지는 '빛'을 활용해 유려한 설치작업을 시도했다. '라이트 스케치(Light Sketch)'라는 이 작업은 직접적인 시간의 경험을 관람객 앞에 제시하고 있다. 태양 빛이 사물에 비추어 생긴 그림자는 시간의 이동을 추적하게 하고, 꽃병 앞에 펼쳐진 노트 위에는 그림자가 머무르다가 이윽고 사라진다. 그런데 관람객은 그 찰나의 시적 순간을 저마다의 뇌리 속에 간직하는데, 이는 영원으로 존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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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겐 스탁의 또다른 작품 '모아레(Moiré)'는 천의 특정한 패턴이 겹치며 발생하는 찰나의 시각적 오류를 미적 도구로 치환한 작업이다. 왜곡된 이미지로 간주되는 순간을 작가는 변칙성과 일시성의 아름다움을 조형적으로 담아냈다. '모아레'가 이렇듯 변칙적인 형상의 조형성을 짚어냈다면 '솔라 카피(SOLAR COPY)' 시리즈는 몽골 고비사막에 등장한 변종식물들의 그림자를 기록해 생태계 속 변이를 시간 안에 담은 작품이다.
한편 홍순명은 시간을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들의 결합'으로 바라본다. 홍순명이 이번 전시에 집중적으로 선보인 '저기, 일상' 연작은 본인이 마주하는 평범한 일상의 단편을 화면으로 옮기고, 같은 날 인터넷 뉴스를 통해 접한 지구 반대편의 사건을 동일한 화면에 중첩한 것이다. 작가는 오버랩된 지점에 마스킹 테이프를 붙이고 떼어내는 작업을 통해 화면의 행간을 입체적으로 조율하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감각한다.
홍순명의 'A국 이야기' 연작도 중첩된 시간을 드러낸다. 아프리카 서부 라이베리아 지역의 노예가 바다에서 노동하는 모습을 담은 과거의 사진과 본인이 바다를 거닐던 어느 여유로운 날의 사진을 화면에 덧놓는 식이다. 바다라는 공통된 장소에서의 각자의 시간은 완벽하게 분리된 차원의 두 현실을 마주하게 하며, 잊혀서는 안될 사건을 화면 내에 상흔처럼 남기고, 이를 기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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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트의 이번 전시는 독일 콘라드 피셔 갤러리(Konrad Fischer Gallery)와 협력 하에 진행됐다. 콘라드 피셔 갤러리는 1967년 독일 뒤셀도르프에 설립된 이래,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을 주도하며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갤러리로 예술의 혁신적 흐름을 꾸준히 제시해왔다. 브루스 나우만, 칼 안드레, 칸디다 회퍼, 올덴버그 & 반 브루겐, 토마스 루프 등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과 협력해왔으며, 그들의 작품 세계를 심도있게 소개하는 전시를 통해 현대미술의 중요한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유르겐 스탁은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사진 거장 토마스 루프로부터 사사했다.
이번 서정아트 서울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인간 누구나 골몰하게 되는 명제인 '시간'을 다룬 기획전으로 시간 속에 존재하고, 시간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성찰하게 하는 전시다. 우리의 경험과 기억을 축적, 변화시키는 시간은 예술·철학·영감의 원천이자 인간 존재의 중심 주제로 오랫동안 탐구되어 왔다. 이번 전시는 두 명의 작가가 그려낸 서로 다른 궤적과 파장을 따라가며, 그들이 전하는 시간의 본질을 조용히 성찰해볼 수 있는 자리다.
art29@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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