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수다옥’을 찾은 여행객은 따스한 차와 창밖 풍경을 만끽하며 ‘조용한 여행’을 즐긴다.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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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분석가인 김용섭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 소장은 2025년 여행 트렌드로 ‘조용한 여행’ ‘침묵 여행’을 꼽았다. 시끌벅적한 유명 여행지 관광보다 고요 속에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여행이 ‘유행’할 것으로 봤다. 요란한 세상과 과잉된 인간관계에 지친 이가 한둘이 아니다. 이들에게 세상 소음에서 잠시 벗어나는 ‘조용한 여행’은 생존을 위한 절박한 선택일지 모른다. 몇년 전부터 ‘웰니스 관광’이 활성화된 이유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웰니스 관광’이 명상, 숲 치유 등을 통해 ‘나’를 만나는 ‘침묵 여행’이기 때문이다. 웰니스는 ‘웰빙’(well-being)과 ‘피트니스’(fitness)가 합쳐진 말로, 몸과 마음, 사회적 관계가 건강한 상태를 말한다. 이를 추구하는 여행이 ‘웰니스 관광’이다.
최근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관광공사는 제주 웰니스 관광지 12곳을 선정했다. 3년 전부터 차별화된 제주 관광을 알리기 위해 시작된 인증제도다. 제주 청정자연을 통한 힐링과 마음 챙김 등을 경험할 수 있는 ‘현묵’(조용히 침묵함) 여행이다. 지난 14일부터 3일간 제주 웰니스 관광지 5곳을 다녀왔다.
‘회수다옥’의 차. 박미향 기자 |
멍 때리며 달곰한 차 한잔
“하루도 안 바쁜 날이 없어요. 여유를 가지고 싶은데, 잘 안돼요.” 지난 14일 오전 서귀포시에 있는 ‘회수다옥’을 찾은 임수경(34)씨는 제주가 고향인 직장인이다. 그의 일터는 도심인 제주시에 있다. 휴가를 내고 ‘조용한 곳’을 찾았다고 했다. 지난 5월께 문 연 회수다옥은 잘 알려지지 않은 ‘티 하우스’다. 그도 그럴 만한 게 회수다옥이 있는 회수동은 서귀포시 서남쪽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 제주 22개 법정동(법으로 정한 동네) 중에서도 작은 마을이다. 과거 마을은 ‘돌아서 흐르는 물’이란 뜻인 ‘도래물’로 불렸다. ‘회수’는 도래물의 한자어다.
‘회수다옥’ 메뉴인 ‘맡김차림’에 차와 함께 나오는 주전부리. 제주 식재료로 만든 먹거리다. 박미향 기자 |
“차도 맛있고 조용해서 지금 정말 편안합니다.” 임씨는 너른 창에서 쏟아지는 달보드레한 햇살을 ‘멍 때리며’ 하염없이 바라봤다. 찻잎 맛이 스민 물 온기도 영접했다. 내면에 침잠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창밖에선 빛과 잎이 버무려진 풍경이 펼쳐졌다. 231㎡(70평) 규모인 회수다옥에는 큰 창이 여러개 있다.
제주가 고향인 콘텐츠 마케팅회사 신시아 서경애(55) 대표는 부모가 살던 집을 개조해 지난 5월께 회수다옥을 열었다. 8년간 폐가처럼 버려졌던 집이다. “여기서 살 때 기억이 좋았는데, 어느 날 중국인들이 팔라고 하더라고요. 한번 팔면 되찾기 어려울 거 같았죠. 물이 좋은 동네니까 지켜야겠다 생각했죠.” ‘티 하우스’를 연 이유다. 몇년 전부터 일기 시작한 ‘티 오마카세’(주인 마음대로 차와 주전부리를 코스로 주는 것) 붐도 한 이유가 됐다. “서울에 국적불명의 차와 음식 내는 데가 많더라고요. 제주에서 중국차나 일본차를 마실 필요는 없잖아요. 제주차와 음식, 화산 옹기토로 만든 찻그릇으로 만든 차를 준비했죠.” 제주차 장인 김맹찬 농부와 숲 치유사 출신 양순아 농부가 재배한 차를 차림표에 넣었다. ‘오마카세’ 대신 우리말 ‘맡김차림’이라 적었다. ‘오마카세’는 ‘남에게 다 맡긴다’는 뜻의 일본어다. 백차, 호지차 등 5가지 차와 몇가지 주전부리로 구성된 ‘맡김차림’은 1시간 정도 차 설명을 들으면서 음미하는 메뉴다. ‘한상차림’ ‘모임차림’ ‘스페셜 티 클래스’ 등도 있다. 미식의 최고봉은 ‘차’라고 했다. 엇구수하다가도 밍밍하고 달곰하다가도 무미의 맛을 선사하는 차 맛 체험이야말로 시간을 조용히 낚는 ‘침묵 여행’이다.
동백마을을 걷다가 발견한 돈가스 가게 ‘호화’의 외관. 색과 모양이 여행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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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고 서둘지도 말아
“조들지 말앙, 와리지 말앙.” 지난 14일 오후 도착한 ‘신흥2리 동백마을’ 동백고장보전연구회 최혜연 사무국장이 마을을 안내하며 건넨 제주 말이다. 주민들이 자주 쓰는 말이라고 했다. ‘걱정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라’는 뜻이다. 자연에서 얻은 지혜가 녹아 있다. 서귀포시 남원읍에 자리한 동백마을의 주민들은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지향한다. ‘설촌’(여러 집이 모여 사는 공동체)을 이룬 지 300년이 넘었다. 지난해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가 ‘최우수 관광마을’로 지정할 정도로 아름답고 고즈넉한 동네다. 그들의 삶에 잠시 편입하는 여행에서 쉼의 미학을 터득한다.
제주 서귀포 남원읍 동백마을 숲.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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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지는 동안라떼’를 파는 전시장 겸 카페인 ‘레스빠스’. 동백마을에 있다.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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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지는 동안라떼’를 파는 전시장 겸 카페인 ‘레스빠스’. 동백마을에 있다.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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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밖으로 탈출을 감행한 귤나무 여러 그루를 지나자 작은 숲이 보였다. 토종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룬 마을 숲이다. 10m가 넘는 동백나무 50그루가 당차게 자리한 숲엔 참식나무, 생달나무, 팽나무 등 다양한 수종도 서식한다. 나무 데크길이 안내한 숲은 고요하다. 마을길은 더 적막하다. 귀는 잠시 휴식하지만 눈은 즐겁다. 창고를 개조한 돈가스집 ‘호화’와 카페 ‘공복정’은 레트로 감성이 충만하다. ‘레스빠스’도 빼놓을 수 없다. ‘미쉐린 가이드’ 기준을 적용하면 ‘오직 레스빠스를 경험하기 위해 충분히 올 만하다’고 평할 수 있다. 건축가인 레이어디자인 윤준호(43) 대표가 1970년대 농협 창고를 개조해 만든 전시장 겸 카페다. 그는 건축사사무소 오끼도 운영한다. 지난 15일 그를 만났다. 코로나 사태 이전만 해도 서울 11곳에 있던 카페가 레스빠스다. 지금은 2년 전 문 연 제주 레스빠스를 빼고 모두 없다. 윤 대표는 “코로나가 치명적이었다”고 말했다. 1487㎡(450평) 규모의 카페 가운데엔 전시장이 있다. 물이 흐르는 수로까지 조성한 마당은 윤 대표가 직접 조경했다. 이곳엔 독특한 메뉴가 있다. ‘젊어지는 동안라떼’다. 윤 대표 집안 내력이 스민 음료다. “탈모 집안입니다. 친척들까지 죄다 민머리인데 저만 풍성하죠.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꾸준히 먹인 게 있어요. 검은콩과 검은깨로 만든 음료인데, 그것 때문에 제 머리카락을 지킬 수 있었죠.” 그가 웃으며 내민 ‘동안라떼’는 구수하면서 달큼했다.
‘레스빠스’에서 파는 ‘젊어지는 동안라떼’. 검은콩과 검은깨로 만든 음료다. 잔 위에 올린 꿀이 단맛을 배가시킨다. 박미향 기자 |
동백마을에 있는 ‘제주펫’ 실내. 제주산 농산물로 만든 반려동물 간식들.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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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마을 주민들이 동백기름의 재료가 되는 동백 씨앗을 고르고 있다.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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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마을은 극강의 고요를 선사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적막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한 창고에서 동백고장보전연구회 최혜연 사무국장과 오동정 회장이 마을 주민 5명과 동백나무 씨앗을 고르고 있었다. 동백기름 제품에 재료로 쓰일 씨앗이다. 2009년 동백고장보전연구회 30여명 회원을 포함한 주민 500여명은 마을 살리기 일환으로 동백마을방앗간을 짓고 동백기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조리용·식용·미용으로 구분해 만든 동백기름은 질이 좋아 단박에 소문이 났다. 2010년엔 아모레퍼시픽과 재료 공급 협약을 맺을 정도였다. 누리집을 통해 판매한다. 동백기름 만찬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서귀포 치유의 숲’에서 사람들이 맨발로 걷고 있다.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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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치유의 숲’엔 야자매트와 걷기 편한 나무 데크길이 있다.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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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치유의 숲’ 풍경.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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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치유의 숲’ 풍경.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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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소리, 흙냄새로 치유
도시 소음에 지친 마음을 달래는 장소로 숲만 한 게 없다. 지난 16일 오전에 찾은 ‘서귀포 치유의 숲’은 난대림, 온대림, 한대림 등이 한데 어우러진, 바람마저 쉬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숲이었다. 본래 화전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곳은 2016년 ‘치유의 숲’으로 거듭났다. 60살 넘는 편백나무와 삼나무도 지척에 깔렸다. 전체 면적은 174㏊(약 53만평). 총길이가 약 18㎞인 산책로는 11개로 나뉘어 여행객을 맞는다. 2019년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tvN) 주인공 윤세리(손예진)가 리정혁(현빈)을 처음 만나는 북한 땅이 바로 이 숲이다.
‘서귀포 치유의 숲’ 여행 후 먹는 ‘차롱치유밥상’은 숲만큼 건강하다. 숲 투어 3일 전에 호근마을회에 예약하면 된다.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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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낯선 이도 친구로 삼게 한다. 이날 노숙인 복지시설인 ‘서귀포시사랑원’이 진행하는 ‘슬기로운 단주생활 힐링캠프’에 참여한 이들도 숲을 찾았다. 알코올 중독으로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기 위해 지난 1년간 집단 상담 등을 한 사회복지사들이 함께했다. 이들은 박재환 산림치유지도사 안내로 숲길을 걷고, 차를 마시며 명상했다. 해먹과 맨발 체험도 하며 호근마을 주민이 차린 ‘차롱치유밥상’도 받았다. 중독으로 일상이 힘들었던 50대 전아무개씨는 “자연 속에서 걸으니 시끄러운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계음이 아닌 새, 바람 소리가 좋고, 화학 냄새 아닌 흙냄새가 정말 좋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키보다 수십배 큰 나무를 올려다보며 묵상에 잠겼다. 유난히 좁고 구부정해 보이는 그의 등이 쭉 펴졌다.
숲은 1일 입장 인원수를 600명으로 제한한다. 사전 예약만으로 거의 마감된다. 예약은 서귀포 통합 예약발권 시스템 ‘서귀포e티켓’(eticket.seogwipo.go.kr)을 통해 하면 된다. 어른 입장료는 1천원, 청소년은 600원이다. 산림치유 프로그램 참가비는 어른이 2만원, 어린이와 청소년은 1만원. ‘차롱치유밥상’은 제주 전통그릇인 차롱에 톳주먹밥, 전복꼬치, 한라산 표고버섯 조림 등이 담긴, 숲만큼 건강한 먹거리다. 호근마을회(064-739-1929)로 3일 전 예약해야 숲 안에 있는 ‘숲속의 집’에서 식사할 수 있다. 1인당 1만7천원.
1968년 제주로 이주한 성범영씨가 일군 ‘생각하는 정원’엔 잉어가 뛰어노는 연못이 있다.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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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제주로 이주한 성범영씨가 일군 ‘생각하는 정원’.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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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제주로 이주한 성범영씨가 일군 ‘생각하는 정원’.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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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제주로 이주한 성범영씨가 일군 ‘생각하는 정원’에선 ‘맷돌 핸드드립 커피’ 체험을 할 수 있다.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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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인간의 손길이 닿으면 정원으로 변신한다. 정원이야말로 자연과 인간이 협업해 만든 창조물이다. 서귀포시 한경면엔 ‘생각하는 정원’이 있다. 1968년 서울에서 제주로 이주한 성범영(85)씨가 수십년간 15만t 넘는 흙과 돌을 나르며 만든 정원이다. 당시 한경면은 황무지였다. 그는 거친 바닷바람과 흙먼지 이는 척박한 땅에 한국 전통 정원수를 심고 분재를 만들어 전시하며 정원을 가꿨다. 1992년 개장 때 이름은 ‘분재예술원’. 2007년 ‘생각하는 정원’으로 이름을 바꾼 이는 성씨의 아들이자 현 대표인 주엽(60)씨다. 그는 “정원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생각을 가다듬게 한다”고 말한다. 작은 정원 8개로 구성된 ‘생각하는 정원’은 3만6천㎡(약 1만3천평) 규모다. 전세계 아름다운 정원을 소개하는 책 ‘세계의 정원’(Gardens of the World, 2022)과 ‘론리플래닛―정원을 탐험하는 즐거움’(Lonely Planet―The Joy of Exploring Gardens, 2023)에 국내 정원으로 유일하게 실렸다. 들머리를 통과하면 기하학적 구조의 돌담과 잘 손질된 분재, 잘 자란 나무들을 차례로 만난다. 주엽씨는 “소나무와 향나무를 중심으로 조성한 제주형 한국정원”이라고 말한다. 이 정원의 별미는 ‘맷돌 핸드드립 커피’다. 맷돌로 원두를 갈면서 보내는 시간이 휴식의 참맛을 선사한다.
‘해비치 호텔 앤 리조트 제주’에는 제주 풍경을 보며 ‘멍때리기’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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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해비치 호텔 앤 리조트 제주’ 실내. 박미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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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정원만 힐링 체험을 제공하는 건 아니다. ‘해비치 호텔 앤 리조트 제주’에 가면 바다를 친구 삼아 달릴 수 있는 도로가 조성돼 있다. ‘해가 처음 비추는 곳’이란 뜻의 ‘해비치’. 알싸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표선해변을 달리는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선라이즈 런’ ‘바이크 라이딩’ 등이다. 요가와 싱잉볼 명상 등도 운영한다.
제주/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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