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기 희생자 진실규명 취소 첫 사례…군법회의 판결문 근거
野위원 "21세기에 1950년대보다 못한 결정이 나왔다" 반발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이 3일 오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에서 열린 제92차 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2024.12.3/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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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박혜연 유수연 기자 =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3일 한국전쟁기 희생자로 결정했던 백락정 사건의 진실규명을 취소했다. 진실화해위가 스스로 내린 진실규명을 취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뉴스1 취재를 종합하면 진실화해위는 이날 오후 진행된 제92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백락정 사건 진실규명 취소' 안건을 의결하고 유족 백남식 씨가 신청한 진실규명 사건을 각하했다.
백락정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7일 충남 서천에서 백락용 씨가 경찰에 갑자기 끌려갔고 사흘 후인 6월 30일 동생인 백락정 씨가 지서에 형의 면회를 하러 갔다가 행방불명된 사건이다. 조카인 백남식 씨가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앞서 진실화해위는 백락정 씨가 군경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보고 작년 11월 28일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지난 8월 다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백락정 씨가 1951년 1월 6일 '이적행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판결문이 나오면서 재조사 결정이 나왔다.
하지만 이상훈 상임위원을 비롯한 야당 추천 위원 4명은 해당 판결문의 적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구체적인 판결 이유나 사실 관계가 빠져 있고, 군법회의 특성상 단심제였기 때문에 법 집행 과정에서 적법 절차를 거쳤는지도 확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군법회의가 적용한 구 국방경비법은 여순사건과 제주 4·3사건 등 군경이 민간인을 학살할 때 많이 이용된 법이다. 당시 판결 주체인 11사단 군법회의는 백락정 씨를 재판한 1951년 1월 6일 하루에만 184명을 재판, 49명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이날 회의에서 김광동 위원장과 여당 추천 위원 4명은 확정 판결문이 있다는 이유로 진실규명을 취소하고 신청 사건은 각하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야당 추천 위원들은 최소한 조사가 더 필요하다는 취지의 '진실 불능'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반박했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야당 추천 위원들이 진실규명 취소에 반발하며 회의장에서 전원 퇴장한 가운데 김광동 위원장과 나머지 여당 추천 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진실규명 취소를 결정했다.
야당 추천 이상희 위원은 "1기 진실화해위에서는 국방경비법 판결문이 있는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판결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적법한 사형 집행이었는지 또는 학살이었는지에 대한 규명 작업 후에 진실규명을 하거나 진실 불능 결정을 했다"며 "각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 위원은 "백락정 씨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고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사형 판결이 정당하다고 본 것"이라며 "한국전쟁기에도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가혹한 처벌이 많이 이뤄지니 국회가 재심 기회를 주거나 변호인 입회 없이 사형 선고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21세기에 1950년대보다 못한 결정이 났다"고 강조했다. 이상훈 위원 역시 "74년이나 후퇴한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백락정 씨 유족들은 지난달 28일 대전지법 홍성지원에 해당 군법회의 판결에 대한 재심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hypar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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