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파동]
200자 원고지 약 8장 분량의 이 선포문에서 국회를 ‘범죄자 집단의 소굴’ ‘괴물’로 규정하고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척결’ ‘체제 전복을 노리는 반국가세력의 준동’ 같은 적대적인 문장과 단어들이 한꺼번에 등장했던 것이다. 계엄사령부 포고령에는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지 않은 의료인은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는 말까지 들어 있어 의료계의 반발을 샀다.
대통령에게서 나오기 기대하기 어려울뿐더러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이 용어들에 대해 “종북이란 말만 없었더라면 북한에서 나온 문서로 착각했겠다” “대학교 대자보에서도 이 정도로 극단적이고 적대적인 용어를 한꺼번에 쓰지는 않을 것”이란 말도 나온다.
그래픽=백형선 |
전문가들은 “갑작스러운 계엄령 선포가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으로 이뤄졌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이상규 전 국립국어원장은 “상대방을 대화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말살해버리겠다는 생각이 담긴 무시무시한 용어들”이라며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공공의 가치를 침해하는 행위를 다른 사람도 아닌 대통령이 저지른 셈”이라고 지적했다. 조규익 숭실대 명예교수는 “품위와 논리는 고사하고, 언어를 일종의 흉기로 삼아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의지가 보인다”며 “그것은 오히려 상대를 더 난폭하고 강하게 만드는 하수(下手)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전혀 정치적인 언어가 아니라, 권위를 내세우는 동시에 상대방을 몰아붙여 겁을 주려고 하는 1980년대 공안 검사식 용어로, 시대착오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고 했다.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는 “1980년대 초 신군부보다도 훨씬 더 거친 표현”이라며 “정치적으로 난관에 봉착한 나머지 정상적인 사고에서 나오기 어려운 날 선 언어가 쏟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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