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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 (토)

“사랑이란 상호보완성을 위한 위대한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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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 레빗 그린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
대세 배우 안은진, 7년 만의 연극 출연


경향신문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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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 입은 여성에게 눈치를 주는 시대였다. 여성은 투표권이 없었다. 부모, 남편, 아이 돌보는 것이 여성의 미덕이지, 인류의 지식 확장에 기여하는 것은 여성의 미덕이 아니었다.

28일까지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사일런트 스카이>는 여성에게 엄혹한 시대를 살았던 천문학자 헨리에타 레빗(1868~1921)의 삶을 충실히 옮긴 연극이다. 목사 아버지의 딸이 고향을 떠나 하버드대 천문대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며 나이 들어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화려한 영상이나 조명, 서사의 해체,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무는 등의 독특한 시도는 없다. 진취적인 헨리에타(안은진)와 전래의 가치를 중시하는 동생 마거릿(홍서영)의 갈등과 이해, 윌러미나(박지아)·애니(조승연) 등 천문대 동료와의 우정, 상급자 피터(정환)와의 사랑과 이별 등을 전통적 방식으로 그려낸다. 극적인 갈등이 고조되는 순간에도 인물들은 좀처럼 절규하거나 소리치지 않는다. 인물들은 차분하고 점잖은 대사로 입장을 설명한다.

나직한 목소리로 이끌어가는 이야기지만, 인물들의 처지는 급박하고 입장은 강경하다. 헨리에타는 동생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의 경력을 위해 세상으로 나아간다.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피터에게 희미한 사랑을 느끼지만, 자신보다 능력이 부족한 피터가 상급자라는 사실에는 모순을 느낀다. 헨리에타·윌러미나·애니의 공은 혁혁했지만, 대학은 이들을 ‘천문학자’가 아니라 ‘계산원’으로 대하며 망원경을 볼 권한조차 주지 않았다. 헨리에타 연구의 진가가 후속 학자들에 의해 증명되고 나서야 헨리에타의 이름은 천문학사에 남을 수 있었다. 애니는 강경한 서프러제트(여성 참정권) 운동가로 묘사된다. 어깨띠를 하고 시위에 나서는 장면은 극 전반의 여성 서사에 자연스럽게 녹는다. 마거릿은 언니의 선택을 못마땅해하면서도 어떻게든 언니를 감싸려 하고, 언니 역시 자기 대신 집안을 돌봐준 동생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동생은 독실한 신앙인이고 언니는 “위대한 발견에 대한 믿음”만을 간직한 무신론자에 가깝다. 상극 같은 입장이지만, 둘은 그대로 서로를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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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사일런트 스카이’에서 천문학자 헨리에타 레빗으로 출연한 안은진. 국립극단 제공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 <연인> <종말의 바보>와 예능 <언니네 산지직송> 등에 출연해 인기가 높아진 안은진이 7년 만에 출연하는 연극이다. 올해 조승우, 전도연, 유승호 등 연극계 스타 캐스팅의 흐름에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다만 <사일런트 스카이>는 특정 배우의 역량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작품은 아니다. 김민정 연출은 안은진의 스타성이나 매력을 강조하지 않았다. 안은진도 헨리에타의 특출함보다는, 동생, 천문대 동료, 연인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과학자인 만큼 ‘이과의 사랑’을 묘사한다. 사랑은 “상호보완성을 위한 위대한 실험”이라고 표현된다. 세페이드 변광성, 항성분류법 등 천문학 용어를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설명한다. 연극을 다 보고 나면 시적인 과학 강의를 들었다는 느낌도 든다.

역사·과학·문학 분야 여성 인물을 조명해온 미국 작가 로렌 군더슨의 작품을 윤색했다. 군더슨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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