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샤르 아사드 정권 타도를 선언한 시리아 반군 ‘하이아트 타리르 알 샴’(HTS)의 지도자 아부 무함마드 골라니가 지난 3월12일 시리아 북부 바브 알-하와에서 가진 기자회견 도중에 ‘셀카’를 찍고 있다. AF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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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내전이 가열되던 지난 2011년 말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일련의 무장대원들이 잠입하고 있었다. 이라크의 알카에다 지부인 ‘이라크이슬람국가’(ISI)의 대원들이었다. 그 중에는 아부 무함마드 골라니도 있었다. 이들은 당시 이라크이슬람국가(ISI)의 지도자이자 나중에 이슬람국가(IS)의 수장이 되는 아부 바크르 바그다디의 주도로 파견됐다. 골라니는 시리아에서 2012년 알카에다 지부인 ‘누스라 전선’을 결성하는 핵심이자 지도자가 됐다.
12년 뒤인 8일 시리아의 바샤르 아사드 정권 붕괴를 담은 선언을 한 반군의 지도자가 바로 골라니다. 골라니가 그 12년 동안 이른바 ‘실용주의자’로 전향해 튀르키예 등의 지원을 받아서 13년에 걸친 시리아 내전과 53년에 걸친 아사드 정권을 종식하는 태풍의 눈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골라니가 지도자인 반군 단체인 ‘하이아트 타리르 알 샴’(HTS·하이아트)은 여전히 미국 등 국제사회로부터 테러단체로 지정된 세력이다. 이런 테러 단체의 수장이 시리아 내전의 승자로 부상하는 과정은 그의 탁월한 변신 능력과 적응성, 이에 더해 주변 중동 국가와 미국 등 서방의 정책 난맥상이 혼재된 결과다.
다마스쿠스 교외의 유복한 가정에서 1982년에 태어난 골라니는 청소년 시절인 2000년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2차 민중봉기(인티파다)와 2001년 9.11테러로 과격한 이슬람주의인 지하디즘(성전주의)에 경도됐다. 미국이 2003년 침공한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자, 이라크로 가서 당시 아부 무사브 자르카위의 ‘이라크알카에다’(AQI)에 가담했다가, 수감됐다. 미군의 이라크 철군 뒤 석방된 그는 2011년 3월 고국인 시리아에서 반정부시위가 폭발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주도로 결성된 누스라전선은 애초부터 알카에다 지부임을 숨기고, 대중적인 노선으로 지지 세력을 확보했다. 당시 그는 “주민들과 잘 지낸 다음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할 것”이라고 조직원들에게 지시했다. 당시 시리아의 대표적 반군인 친서방 자유시리아군(FSA)는 일관된 지휘체계가 없는 연합체에 불과했고, 서방의 지원만을 쫒는 부정부패가 극심했다. 대부분 외국에 있던 자유시리아군 지도자들은 ‘호텔 참호에 있는 지도자’라는 야유를 받았다.
누스라전선은 달랐다. 지도자나 대원들이나 내전 현장에서 전투력과 헌신성에서 다른 반정부 세력을 압도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친서방 세속주의 반정부 세력과 연대를 구축하고, 엄격한 계율을 강제하지 않았고, 주민들을 위한 사회서비스 제공에 치중했다. 수니파 이외 주민들에게도 저변을 넓혔다.
곧 미국은 누스라전선이 알카에다의 별칭일 뿐이라며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시리아 전역에서 주민들은 “시리아에서 유일한 테러주의 세력은 아사드”라는 구호를 들고 행진했고, 수십 개의 반군 조직들은 “우리는 모두 누스라전선이다”라며 옹호했다. 2013년을 지나며 누스라전선은 동북부의 이들리브·알레포 등지에서 완전히 거점을 굳혔다.
시리아에서 누스라전선이 세력을 확대하자, 모 조직인 이라크이슬람국가의 수장 바그다디는 2013년 4월13일 누스라전선이 자신의 조직에서 파생됐고, 두 조직을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ISIL)로 통합한다고 발표했다. 골라니는 즉각 이를 부인하고, 참가를 거부했다. 하지만, 대세는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 쪽으로 넘어가, 2014년 6월이 되자, 시리아와 이라크의 각 3분1을 장악한 이슬람국가(IS)로 진화했다.
누스라전선의 대원 대부분이 이슬람국가 쪽으로 넘어가자, 골라니는 이때부터 현실주의자 혹은 실용주의자로 더 변신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사드 타도를 주목표로 내걸었으나, 아사드 정권 지지 기반인 알라위파에 대한 복수도 금지하고, 서방과의 타협을 더 추구했다. 극성하던 이슬람국가가 2015년을 지나면서 서방의 군사작전에 의해 패퇴하기 시작하고, 내전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아사드 정부 쪽의 승리로 굳어졌으나, 골라니는 튀르키예 접경인 시리아 북동부의 이들리브에서 잔존할 수 있었다. 튀르키예의 지원과 서방의 묵인 때문이었다. 골라니는 2016년 알카에다와 완전히 결별하고는 하이아트를 결성했다.
골라니와 하이아트는 이들리브에서 사실상 지방정부 역할을 했다. 경쟁 반군 세력들을 철저히 소탕하기는 했으나, 치안과 복지를 제공하고, 소수종파 주민들도 보호했다. 2020년 시리아 내전이 사실상 아사드 정부의 승리로 끝났으나, 이들리브에 생존한 골라니와 하이아트는 사실상 튀르키예와 서방 등이 아사드 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로 남았다. 명목뿐인 자유시리아군에 대한 이스라엘이나 서방의 은밀한 지원은 사실상 하이아트로 흘러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10월7일 발발한 가자전쟁은 골라니를 다시 불러냈다. 이스라엘이 아사드 정권의 동맹인 레바논의 헤즈볼라, 이란 등을 맹공하고,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발목이 묶였다. 특히, 아사드 정권은 헤즈볼라가 제공하던 지상 병력이 사라지자, 무력해졌다. 지난 11월27일 이스라엘과 헤즈볼라가 휴전하자마자, 골라니의 하이아트는 전격적인 공세를 시작했고, 11일만에 다마스쿠스까지 진공했다. 배후에는 튀르키예의 지원과 서방의 묵인이 있었다. 이번 진공 과정에서 자유시리아군 명의로 이스라엘에 아사드 정권 폭격을 요청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골라니는 지난 6일 시엔엔과 회견에서 “우리가 목표를 얘기할 때 혁명의 목적은 여전히 이 정권의 타도로 남아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데 모든 가용한 수단을 쓰는 것이 우리의 권리이다”고 말했다. 시리아 내전이 종전될지는 여전히 안갯속이나, 골라니와 하이아트의 득세는 그 안개를 더욱 짙게 하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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