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현지시각) 스톡홀름 스웨덴 시청사에서 비춰지는 한강 작가의 모습. 9분 분량의 레이저 영상 ‘리딩 라이트(Leading Lights·선구자들)’이 시청사 근처를 밝히고 있다. 사진 장예지 특파원 penj@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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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쪼그려 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한강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3부 불꽃)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얼굴이 겨울밤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사 외벽을 장식하던 8일(현지시각), 노르스트룀 강변을 따라 그의 소설 속 한 구절이 한국말로 울려퍼졌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여성 수상자들의 글을 낭독하는 ‘문학의 밤’ 행사에서 한강 작가 책의 낭독자로 참여한 교민 신미성(45)씨가 직접 고른 구절이었다. 제주 4·3을 다룬 이 책에 대해 신씨는 “어머니 정심이 겪은 고통을 딸과 함께 마주하며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그 지극한 사랑이 감동이었다”고 했다.
노벨상 수상자들을 축하하는 노벨 주간을 맞아 열린 이번 행사에선 올해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와 더불어 그라치아 델레다(이탈리아·1926년 수상), 올가 토카르추크(폴란드·2018년), 아니 에르노(프랑스·2022년)의 책이 낭독 도서로 선정됐다. 문학의 밤 행사는 특별히 여성 수상자들의 작품을 소개하며 이들의 모국어와 스웨덴어로 책 일부를 들려준다. 이날 한강 작가의 책을 스웨덴어로 낭독한 흑인 여성 배우 안나 시세는 “(한강 작가의) 책은 개인의 트라우마를 다루는데, 이는 흑인으로서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트라우마 또한 연상되도록 한다”며 “‘작별하지 않는다’ 속 정심과 그녀의 트라우마를 이해하는 딸 인선의 사랑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8일(현지시각) 스톡홀름 부두에서 열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여성 수상자들의 글을 낭독하는 ‘문학의 밤’ 행사에한강 작가 책의 낭독자로 참여한 교민 신미성(45)씨. 사진 장예지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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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노벨상 수상에 있어서도 소수자다. 1901년 노벨상이 제정된 이래 모두 976명의 개인과 28개 단체가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이 가운데 여성 수상자 수는 65명에 불과하다. 문학상 또한 수상자 121명 중 여성은 18명에 머무르고, 한강 작가는 아시아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이 상을 받았다. 1993년 토니 모리슨이 백인이 아닌 여성으로선 최초로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노벨 위원회는 여성 수상자들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스톡홀름 시청 맞으면 부두에 설치된 ‘돔 아데톤’(De Aderton)’엔 노벨문학상 여성 수상자 18명의 얼굴이 스테인드글라스로 새겨졌다. 이들의 얼굴 아래엔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121명의 이름이 쓰였는데, 여성은 빨간색으로 표시해 두드러진 대비를 보이도록 했다. 돔 아데톤은 여성 수상자 18명과 문학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 종신회원 18명의 의미를 중의적으로 갖는다. 돔 아데톤 설치와 문학의 밤 행사를 총괄한 건축가 엘리스 세르빈(29)은 “(돔 아데톤은) 오직 여성을 위한 공간으로, 여성의 이름을 빨간색으로 써 성별 불균형을 강조하고 싶었다”며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들의 초상화를 그려 빛이 반사될 때 신성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스톡홀름 시청 맞으면 부두에 설치된 ‘돔 아데톤’(De Aderton)’. 스테인드글라스로 새겨진 한강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장예지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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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시청 맞으면 부두에 설치된 ‘돔 아데톤’(De Aderton)’. 돔 아데톤 설치와 문학의 밤 행사를 총괄한 건축가 엘리스 세르빈(29)은 “(돔 아데톤은) 오직 여성을 위한 공간으로, 여성의 이름을 빨간색으로 써 성별 불균형을 강조하고 싶었다”며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들의 초상화를 그려 빛이 반사될 때 신성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사진 장예지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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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 아데톤의 맞은편에 위치한 시청사엔 9분 분량의 영상 ‘리딩 라이트(Leading Lights·선구자들)’가 스톡홀름의 밤을 밝힌다. 리딩 라이트는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인 마리 퀴리를 시작으로 65명 여성 노벨상 수상자에게 존경을 표하는 의미에서 제작됐다. 레이저로 빛을 쏜 동영상은 높이 106m 규모의 시청사 탑과 벽면 전체를 한번에 덮어 장관을 만들어낸다. 이곳에서 한강 작가의 얼굴과 함께 ‘하얀 것은 본래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소설 ‘흰’의 구절이 한글과 영어로 교차된다. 높은 위도 탓에 오후 3시면 어둑해지는 스톡홀름에서 한강 작가와 그의 글은 긴 밤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8일(현지시각) 스톡홀름 스웨덴 시청사에서 비춰지는 한강 작가의 모습. 그의 소설 ‘흰’의 구절 ‘하얀 것은 본래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가 레이저 빛에 반사된 뒤 사라진다. 사진 장예지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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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장예지 특파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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