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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목)

[기자24시] 계엄 선포 그날, 응급실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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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온한 밤이었다. 10시 넘어 머리를 다친 취객이 응급실 문을 두드렸고, A씨는 상처 부위를 열심히 꿰매고 있었다. 평범했던 하루가 삽시간에 무너진 것은 A씨가 진료를 마친 직후다. 지난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현장을 이탈한 의료인들'에게 48시간 내 근무지로 복귀할 것을 명령했다. A씨는 지역 2차병원의 응급의학과 의사이자 사직 전공의다. 그는 "계엄 선포 당시 나를 바라보던 간호사 선생님들의 당혹스러운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처음엔 무서웠다"고 회고했다. 대통령이 처단하겠다는데 그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바로 억울한 마음이 들었고, 분노가 차올랐다고 했다. A씨는 "내가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밤늦게까지 환자를 돌보는 것뿐인데 왜 이런 좌절감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원래 다니던 수련병원까지는 이 병원에서 수십 분이면 가는 거리이지만 이제는 아예 멀어졌다"고 말했다.

지난달만 해도 의료계 내부에서는 수련 재개를 고민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수능이 끝났고 정시 원서 접수도 곧 진행되는데, 지금처럼 의료계가 '증원 백지화'만 고집하는 건 실익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수련을 다시 시작하는 조건으로 정부에서 받아낼 건 받아내는 것이 낫다는 주장이 나왔고, 이 같은 협상론은 꽤 힘을 얻었다고 한다.

작게나마 존재했던 변화의 불씨는 계엄 사태로 완전히 소멸했다. 사직 전공의 B씨는 "계엄으로 얻은 게 있다면 정부가 의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두가 알게 됐다는 점"이라며 "의정 대화는 끝났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의 유일한 업적으로 꼽힐 만큼 간절했던 의료개혁이, 포고령에 담아서라도 꼭 매듭지으려 했던 의료개혁이 아이러니하게도 그 폭력적 욕심 때문에 좌초됐다.

최근 마감된 내년 상반기 레지던트 모집은 예정된 파국으로 끝났다. 비수도권 수련병원은 지원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곳이 적지 않다.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는 그나마 참여해온 의료단체 세 곳이 전부 탈퇴했다. 불도저식 개혁이 지난 10개월간 남긴 건 폐허가 된 의료 현장뿐이다.

[심희진 과학기술부 edge@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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