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ㆍ한국전략경영학회장
위기일수록 투명한 정보공개 필수
존엄성 지키며 보편가치 지향해야
올해 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2.3%로 다소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1분기 1.3%, 2분기 -0.2%, 3분기 0.1%로 전망치 달성이 어려워졌으며, 수능 당일 삼성전자 주가가 5만 원 아래로 내려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국내 주식시장 부진에 따라 해외 투자자들의 매도세가 이어졌고, 국내 투자자들의 소위 ‘국장’ 이탈이 계속되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같은 장기 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여기에 정치적 불확실성의 고조는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기대 대신 걱정을 키우고 있다. 정치적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장기침체에 빠질 우려가 높아지는 우리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도 필요하다.
계엄 발령과 해제 과정에서 해외 주요 신용평가기관들은 우리나라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이는 그동안 우리나라가 발전했고 세계 경제에서 쌓은 평판이 상당함을 보여주는 긍정적 신호였다. 그러나 사회적 평판이나 지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러 사례를 통해 좋은 평판이 사건 및 사고 발생 시 어느 정도의 면역을 제공해주지만, 기대에 크게 벗어나게 될 경우는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01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 기업으로 꼽히던 엔론은 회계장부 조작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중요한 것은 엔론만 사라진 게 아니라 회계감사를 담당했던 세계 1위 회계법인 아서 앤더슨도 운명을 같이했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이유는 엔론 분식회계 과정과 관련된 문서 파기 등으로 유죄 평결을 받아 감사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 유죄 평결 이전에도 이미 신뢰를 잃은 세계 1위 회계법인에 의해 감사를 받게 될 경우 분식회계를 의심받을 것을 우려한 기업들이 감사법인 변경을 연이어 요청하면서 이탈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대대적인 광고에도 불구하고 떠나려는 고객을 돌려세울 수 없었다. 따라서 침체에 빠질 위기에 처한 우리 경제를 위해서라도 투명한 정보 제공과 원칙 있는 행동이 필요한 때다.
이번 사태의 배경에는 정치적 양극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양극화는 이미 세계적 현상이며, 소득불평등과 같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는 처분가능소득 기준으로는 불평등이 다소 감소하고 있으나, 자산 기준으로는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으며, 특히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부동산 소유 비율이 높은 세대와 그렇지 못한 젊은 세대 간 경제 격차가 크다. 점점 더 경제가 어려워진다면 이러한 격차는 더 커질 것이며, 이에 따라 정치적 양극화도 심화될 것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커지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통해 희망을 갖게 되는 측면도 있었다. 바로 가장 권위 있는 명령도 무분별하게 따르지 않는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무렵 한국에 오래 살았던 미국인 친구는 한국과 미국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두 나라 모두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있지만 미국은 지위가 낮은 사람도 존엄성을 갖고 행동하는 반면 한국은 지위가 높은 사람만이 존엄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개개인으로 뛰어나고 좋은 사람들이지만 위계의 정점에 있는 사람의 명령에 다소 지나치게 순응한다는 관찰이었다. 존엄성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맡은 일과 책임에 있어 단순히 위계가 높은 사람이 명령한다고 해서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개인적 가치와 보편적 윤리 가치를 모두 판단하여 행동한다. 이번에 우리는 존엄성을 가진 사람들을 보았다.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옳고 그름이 정해지지 않는 사회, 그것이 바로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사회이다. 올해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들의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도 강조했듯이, 결국 민주적 의사결정과 상호 존중이 혁신과 발전의 핵심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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