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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 (일)

명심보감의 저자는 고려 문신? 원나라 말 무명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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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가 만난 사람]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조선일보

명심보감

범입본 지음 | 안대회 평역 | 민음사 | 664쪽 | 3만3000원

이 복잡하고 골치 아픈 2024년 말에 무슨 케케묵은 ‘명심보감’이란 말인가. 더구나 ‘만오만필’ ‘연경’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 고전을 새로운 모습으로 번역해 내놓는 일을 많이 했던 고전학자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이번엔 누구나 다 아는 책을 번역하다니? 그러나 안 교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지금껏 우리는 대부분 명심보감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으며, 이것이 첫 완정본(完整本)”이라는 얘기다. 우리나라에만 200종 넘는 번역본이 나왔는데, 단 7종을 제외하면 모두 조선시대 광해군 때 만들어진 축약본을 풀어낸 것이었다. 축약본의 분량은 원문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원본에 없는 구절을 마음대로 넣거나 뒤섞어 무단 증보·해체한 경우도 있었다.

원문 전체를 번역한 7종 역시 그가 보기에 오역이 많다고 했다. 대표적인 것이 책 속 34곳에서 ‘태공왈(太公曰)’이라 쓰인 것을 ‘강태공이 말하기를’이라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태공은 기원전 11세기 주(周)나라의 여상(강태공)이 아니라 당나라 때 서당 훈장 격인 향촌 교사를 가리키던 일반명사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아동 교육서 ‘태공가교’에서 인용한 말이었다.

조선일보

‘명심보감’의 새 번역본을 낸 안대회 교수는 “명심보감은 고루한 도덕책이 아니라 대단히 철학적이며 실용적인 내용을 담은 처세 지침서”라고 말했다. / 조인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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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있다. 도대체 명심보감은 누가 쓴 책인가? 한국인인가 중국인인가? 여전히 상당수의 책과 사전류는 ‘고려 충렬왕 때 문신 추적’을 저자라 밝히고 있다. 조사해 보니 19세기에 ‘추적 저자설’이 한국에서 생겨났고, 남베트남 방문 중 명심보감을 선물받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1959년 ‘국역증보명심보감’이 보급될 때 저자를 추적으로 표기한 게 잘못 알려진 계기가 됐다. 그러나 진상은 이미 1970년대에 밝혀졌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명심보감 판본인 1454년 간행 ‘청주본’이 국내에서 발견됐고, 서문을 쓴 책의 저자가 원말명초의 무명 학자 범입본(范立本)이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범입본은 고루한 도덕책을 쓴 것이 아니었다. ‘논어’ ‘법구경’ ‘노자’ 같은 유교·불교·도교의 경전뿐 아니라 당대에 유행하던 잠언집과 격언집, 구전 속담까지 두루 인용했다. 그러나 허황되거나 난해해 보이는 부분은 모두 빼고, 삶을 살아가며 당장 현실에서 활용할 수 있는 매우 실용적인 교훈을 뽑아내 쉽고 강렬한 문장으로 다듬었다. 그냥 짜깁기한 게 아니라 그 속에 동양 사상의 정수와 경험적 사유를 담아냈다. 한마디로 동양의 ‘철학적 처세서’이자 ‘자기계발서’였던 것이다. 명심보감에는 ‘인생은 실전이고 세상은 냉혹한 것’이라는 가치관이 깃들어 있었다.

그 결과 ‘남의 허물을 들으면 부모의 이름을 들은 듯이 귀로만 듣고 입으로는 말하지 말라(聞人過失, 如聞父母之名, 耳可得聞, 口不可得言也)’ 같은 사회생활의 조언부터 ‘어려서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아는 것이 없고, 봄에 논밭 갈지 않으면 가을에 바랄 것이 없으며, 새벽에 일어나지 않으면 그날 하루 한 일이 없다(幼而不學 老無所知, 春若不耕 秋無所望, 寅若不起 日無所辦)’ 처럼 나이 들어 읽으면 무릎을 칠 만한 인생의 가르침까지 수록할 수 있었다. 안 교수는 “범입본이야말로 14세기 동양의 데일 카네기나 스티븐 코비였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안 교수는 이번 책에서 다양한 판본을 비교해 원문과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고 총 20장 774개 조로 이뤄진 명심보감의 원래 모습을 복원했다. 자세한 해설을 붙였을 뿐만 아니라 출전을 밝히지 않은 302개 조 중에서 100여 개 조의 출전을 새로 찾아냈다.

범입본은 명심보감을 바탕으로 한 실생활 백과사전 ‘치가절요’도 썼는데 흥미롭게도 이 책은 한국에서만 전해졌다. 중국에선 최근에야 명심보감 관련 책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이후 거의 잊힌 책이었다가 한국 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는 걸 보고 “저런 책이 있었어?”라며 뒤늦게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정치인이 진작 읽었더라면 좋았을 만한 구절이 혹시 있느냐’는 질문에 안 교수는 책을 펴 들더니 5장 104조 구절을 보여 줬다. “얻지 말아야 할 것을 얻은 것보다 더 짧게 가는 것은 없고(短莫短於苟得), 제 능력을 믿고 오만한 자보다 더 외로운 사람은 없다(孤莫孤於自恃).”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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