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15 (일)

‘내란의 시간 속에서’…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주는 울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계엄의 공포가 되살아난 12월…“, 가장 현재적 작품”

경향신문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지난 12월 10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노벨문학상 메달과 증서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주간경향] 한강 작가가 지난 12월 10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생중계하면서 많은 이들이 실시간으로 그의 수상을 지켜봤다. 지난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내란의 시간’ 속에서, 계엄 선포 이후 국가 폭력의 참상을 고발한 작품들을 쓴 작가를 전 세계가 주목하는 아이로니컬한 장면이었다. 자긍심과 부끄러움이 교차하는 시간 속에서 독자들은 다시 그의 작품을 펼쳐 들었다.

■계엄 후폭풍 속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광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2014)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작별하지 않는다>(2021)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장편소설들이다.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한 후 민간인 학살이 진행되는 과정을 상기할 수밖에 없는 작품들이다. 지난 12월 6일 한강 작가는 스톡홀름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해 1979년 말부터 진행됐던 계엄 상황에 관해 공부를 했었다. 2024년에 다시 계엄 상황이 전개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방송사 유튜브 계정을 통해 이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계엄 정국에 <소년이 온다>를 쓴 작가가 노벨상을 타다니”, “축하받아야 할 자리에 이게 무엇인가”, “윤석열은 대한민국을 수치스럽게, 한강 작가님은 자랑스럽게” 등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반응을 댓글로 남겼다.

비상계엄이 없었다면, 올해 12월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오롯이 축제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10월 10일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직후 독자들은 서점으로 달려가 그의 책을 샀고, 읽었고 같이 기쁨을 나눴다.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열린 지난 12월 10일 서울과 광주 등 국내에서도 여러 행사가 열렸다. 서울 성북구 아리랑도서관에서는 성북문화재단 주최로 ‘지금, <소년이 온다>’란 주제로 특별 강연이 열렸다. 출판사 창비 재직 당시 <소년이 온다>를 편집한 김선영 출판사 핀드 대표가 강연자로 나섰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그날, 한국의 많은 독자와 마찬가지로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경향신문

한강 작가가 지난 12월 6일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상박물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정말 엄청난 일이고, 작가 본인에게 가장 기쁜 일이기도 하겠지만 편집자로서도 순수한 독자로서도 굉장히 기쁜 일이었습니다. 한강 선생님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면 영영 모를 수 있는 기쁨이었겠죠.”

김 대표는 한강 작가가 2013년 11월 창비 문학블로그에 <소년이 온다>를 연재하던 이야기부터 단행본이 나올 때까지의 과정을 소개했다. 당시 연재를 마치며 한강 작가는 “왜 나는 인간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과 의심을 품고 살아왔을까 하는 질문 속에서 이 소설을 시작했다”며 “이 소설을 피해갈 수 없었다”고, “이 소설을 통과하지 않고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고 느꼈다”고 썼다고 한다. 이는 한강 작가가 지난 12월 7일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한 말과 맞닿아 있다.

한강 작가는 ‘빛과 실’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소년이 온다>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김 대표는 “최근 며칠간 이 강연을 준비하기 위해 이 소설을 펼쳐보려는 마음과 소설 안에서 만나는 장면이 현실에서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 같은 것들이 뒤섞여서 굉장히 복잡하고 씁쓸한 마음이었다”며 “한편으로는 <소년이 온다>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저 또한 5·18 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지 않고 이 작품을 하면서 큰 공부를 했다”며 “역사적인 사실만으로 아는 것과 문학 작품을 통해서 그 사건을 다시 체득하는 것은 굉장히 다른 것이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도 들고, 지금 이어지는 현실적인 감각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고 했다.

독자들의 감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날 강연을 들으러 온 50대 독자 정경훈씨는 “고3 때 5·18 민주화운동에 관해 처음 알고 너무 놀라서 잠을 못 잤다. 몇 년 뒤 광주 5·18묘역에 직접 찾아가 울었던 적이 있다”며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다큐를 다 찾아봤고 <소년이 온다>는 사놓고 너무 힘들까 봐 몇 년 동안 읽지를 못했다”고 했다. 우연인지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기 며칠 전 마음을 다잡고 하룻밤 새 책을 읽었다는 정씨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내가 대단한 작품을 알아봤다는 기쁨이 있었다”며 “이런 일(비상계엄 선포)이 있을 줄 모르고 저는 이 기쁜 날(시상식)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할지 기대하고 있었다”고 했다. 정씨는 지금 시국과도 연결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지금 MZ세대는 (책 속에 나온 폭력을) 용납할 수 없으니까. 서로 절제하면서 (계엄을 막았다). 1980년대 시민들이나 지금 시민들은 여전히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구나, <소년이 온다>라는 책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고 했다.

성북구는 2012년 이후 매해 주민들과 함께 읽은 ‘한 책’을 선정한다. 전문가들이 선정해오던 것을 2016년부터는 주민들이 직접 토론을 통해 정했고, 그 해 ‘한 책’은 <소년이 온다>였다. 당시 <소년이 온다>가 ‘정치적인 책’이라며 난색을 보이던 어른들 틈에서 한 고등학생이 손을 들어 “언제까지 역사적 사실을 곪아두게 하려 하느냐”며 <소년이 온다>를 추천했다고 한다. 김주영 성북문화재단 도서관사업부장은 “한강 작가가 자신의 책은 독자와 함께 만드는 것이라 했는데, 주민들이 처음으로 직접 선택한 책이 <소년이 온다>였다는 건 굉장히 의미가 있었다”고 했다. 이명희 성북구 한책추진단 운영위원장은 “청소년, 젊은 층일수록 ‘왜 이런 것을 이야기하지 않느냐’며 민감한 소재에 대해서도 읽고 토론할 것을 제안한다”며 “이 시점에서 <소년이 온다>가 가장 현재적인 책이 아닌가 싶다. 이번 방학 때 아이들과 다시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편집한 김선영 출판사 핀드 대표가 지난 12월 10일 서울 성북구 돈암동 아리랑도서관에서 ‘지금, <소년이 온다>’란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김향미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강 작가는 지난 12월 10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직후 소감에서 “우리를 서로 연결시키는 언어, 이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품고 있다”며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회견과 강연을 통해서 문학이 자신과 타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끔 하며, 서로가 ‘연결’돼 있다는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했다. 스웨덴에서 전해진 이 같은 한강의 ‘언어’는 시국의 엄중함을 상기할 뿐만 아니라 ‘각자도생’에 내몰린 한국의 독자들에게 위로가 됐다.

■문학에 관한 관심 계속될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국 문학을 읽는 독자들이 늘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이후 엿새 만에 한강 작가의 책이 100만부 넘게 팔렸다. 온라인서점 예스24에 따르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지난 10월 10일부터 12월 9일까지 한강 작가의 작품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약 83배 증가했다. <소년이 온다>는 9주 연속 종합베스트셀러 1위를 유지했다. 같은 기간 <채식주의자>와 <작별하지 않는다>도 종합베스트셀러 5위권에 자리했다. ‘노벨상 주간’을 앞둔 12월 첫 주엔 한강 작가 작품 판매량이 전주 대비 42.8% 상승하는 등 관심이 이어졌다. 교보문고 집계도 비슷하다. 교보문고에서 <소년이 온다>는 올해 단 두 달(10~11월) 판매량만으로 연간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이례적인 인기를 누렸다.

다른 작가의 문학 작품도 관심을 받았다. 예스24 측은 “지난 10월 10일부터 12월 9일까지 한강 작가의 작품을 제외한 문학(소설·시·희곡 분야)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약 10% 이상 증가세를 보였다”고 밝혔다. 교보문고의 집계를 보면 한강 작가에 관한 관심으로 올해 소설 분야는 판매량 점유율에서 전년 대비 35.7%나 신장했다.

이 열기는 계속될까. 김유리 예스24 소설·시·희곡 PD는 “기존에도 노벨문학상 수상 도서는 수상 연도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곤 했다”며 “한강 작가는 국내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점에서 더 관심을 받을 것이고, 더불어 내년 한강 작가의 신간 소식도 전해질 것으로 예상돼 한강 신드롬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측된다”고 말했다. 김현정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담당은 “올해 6월 말 서울국제도서전에 유료 관객(약 15만명)이 이례적으로 많이 몰리고, 김애란·정유정 작가 등 인기작가의 신작이 발표되는 등 애초에 올해 하반기는 출판계가 주목할 만한 시기였다”며 “또 젊은 층에서 ‘텍스트힙’(글이나 책을 뜻하는 텍스트와 멋지다, 개성있다는 의미의 ‘힙’을 합친 신조어) 문화가 형성되는 등 텃밭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면서 출판시장이 부응할 상황이 배가됐다”면서 “한동안 이런 인기가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계엄해제, 탄핵 순간 사라진 국회의원은 누구?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