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일 오후 5시경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순간. 국회의사당부터 여의도역까지 의사당대로를 꽉 메운 시민들 사이에선 일제히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곧바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떼창이 시작됐다. ‘좋지 아니한가’ ‘삐딱하게’ 등 이른바 탄핵 플레이리스트에 맞춰 머리 희끗한 어른도, 반짝이는 응원봉을 든 20대도 함께 춤을 췄다. 그건 45년 전으로의 역사적 퇴행을 막아 냈다는 안도감이었다.
▷1987년 민주화로부터 이제 37년이 지났다. 민주주의 역사가 짧기에 3일 한밤 비상계엄과 같은 반동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간 민주주의로 단련된 시민들의 수준은 달랐다. 지하철 여의도역 출구를 나오자 앳된 학생들이 수줍게 “추운데 가져가세요”라며 핫팩을 나눠줬다. 자칫 사고 우려가 있을 만큼 인파로 가득했지만 시민들은 침착했다. 서로 밀칠까 조심하며 걸었고, 너무 밀집돼 위험하다 싶으면 누군가 나서 “2줄로 가요” “유모차 있으니 비켜주세요”라고 교통정리를 했다.
▷커피나 빵이 선결제된 카페에선 시민들이 몸을 녹였다. 인근 빌딩들은 화장실을 개방했다. 2020년 5월 미국에서 경찰 폭력에 목숨을 잃은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촉발된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가 한창일 당시 뉴욕 등 주요 도시 상점이 약탈당했던 것과 비교된다. 그래서 상점은 시위가 예정된 날이면 나무판자를 덧대 아예 봉쇄했다. 외신들이 K팝 콘서트 같은 한국의 시위 문화를 주목하는 이유다.
▷이날 탄핵 집회에선 해학이 가득 담긴 깃발이 곳곳에서 나부꼈다. ‘제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사람들’은 무언가 행동해야 한다는 데 슬퍼하며, ‘고주망태 연합’은 나라 걱정 없이 술 마시고 싶어서 나왔다고 했다. ‘고혈압약 어버이 연합’은 혈압이 올라서, ‘갱년기 연합’은 열불이 나서 집회에 참여했다. ‘통영 아기들 보호단’은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겠다는 엄마들이 뭉쳤다. ‘화병 걸린 TK(대구 경북) 딸내미 연합’과 ‘부모님 몰래 시위 나온 PK(부산 경남) 청년 연합’도 있었다.
▷시민들이 자체 제작한 깃발을 들고나오는 건 어느 단체에 정치적으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여했다는 의사 표시 방법이다. 이들 깃발의 공통된 주장은 단 한 가지, 일상을 되돌려 달란 것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 비상계엄으로 불안에 떨지도, 가족과 친구의 안위를 걱정하지도, 존엄할 권리를 위협받지도 않는 ‘보통의 하루’를 되찾고 싶다고 했다. 시민들은 한밤 계엄 선포를 막기 위해 국회로 달려 나오는 용기를 보였고, 질서정연한 평화 시위로 탄핵을 이끌어 냈다. 우리는 2024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수준과 시민의식에 맞는 그런 대통령을 가질 자격이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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