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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 (월)

일과 사랑의 차이[내가 만난 명문장/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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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그 후의 이야기는, 그랑에 따르면, 뻔했다. 누구나 마찬가지. 결혼을 하고, 좀 더 사랑을 이어나가고, 일을 한다. 그러다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 사랑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중


동아일보

이혁진 소설가


일과 사랑은 본성이 다르다. 일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의 뜻을 따라주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보상으로 돈을 받아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우리를 기다려준다. 우리의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들 자신보다 우리를 먼저 헤아려 주고 배려해 준다. 그래서 일을 하다 보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게 된다. 기다려 달라고, 내 입장과 심정을 좀 헤아려 달라고. 일이 사랑의 조건이라도 된다는 듯,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

기실 일은 생활의 조건에 불과하다.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같이 생활할 수 있고 그런 생활이 인용한 문장에서 말하듯, 누구에게나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경험으로도 알 수 있다. 일을 많이 하고 돈을 잘 번다는 게 좋은 배우자나 부모가 되는 것과 무관함을 나이를 먹을수록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과 그 보상인 돈을 생활의 조건이 아닌 사랑의 조건이라고 착각하는 건 사랑을 모르거나 사랑하는 것을 이미 까마득히 잊어버린 사람들뿐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조건은 무엇일까. 우리가 부모에게서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분명해진다. 값비싼 장난감이나 성대한 만찬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할 때 함께 있어줬던 시간들, 우리를 기꺼이 기다려주고, 늘 자신들보다 먼저 우리를 헤아리고 배려해줬던 무수한 날들이다. 사랑의 조건은 물리적 시간이다. 시간만이 사랑을 한낱 말이 아닌,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진실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말에는 사실 낭만이 없다. 아무도 시간을 돈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

12월이다.

이혁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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