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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 (월)

비극 계엄과 희극 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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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극에서 코메디로 변한 계엄치하

법 전문가 아닌 상식적인 대통령이 필요

그들은 현관에서 신을 벗지 않은 채 마루로 올라왔다. 그리고 해직기자였던 아버지 행방을 물었다. 모른다고 하자 집을 뒤져 아버지가 쓴 글, 읽던 책을 가져갔다. 당시 아버지는 어디론가 몸을 숨긴 상태였다. 집에는 몇달째 연락도 없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당시 벌어진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낯선 자들이 구둣발로 집에 들어와 협박하고 물건을 가져갔다. 상식적으로 저들이 잘못했는데 우리는 고발도, 항의도 못 했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중앙정보부(현 안기부) 요원들이었다. 와중에 이웃이라고 생각했던 앞집 사람들이 이른바 정보기관 끄나풀이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몰래 우리 집을 감시하기 위해 이사와 아예 터를 잡고 살았다고 했다.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편하게 말하기엔 세상 공기가 너무 무거웠다. 1979년 10월27일부터 1981년 1월24일까지 무려 456일간 이어진 비상계엄령 아래서 벌어진 일이다.

우리 집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같은 시기 광주에선 민주화를 요구하다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다. 신군부는 1980년 5월17일 제주를 제외한 전국을 대상으로 했던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다음 날 광주에서 비극이 벌어졌다. 민주화와 계엄해제를 외치는 시민들에게 군부가 총칼을 들이민 것이다.

625 전쟁 이후 정권이 계엄을 선포한 것은 총 8번이다. 1960년 4월 혁명, 1961년 5·16군사정변, 1964년 6·3항쟁, 1972년 10월 유신, 1979년 부마민주항쟁과 10·26사태, 1980년 5·17군사쿠테타,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정권이 이달 3일 계엄령을 내렸다. 과거 계엄은 비극이었다. 공기에서 화약냄새, 피냄새가 났다. 고통 속에 생명이 스러져가는 갔다. 공포가 세상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 정권 계엄은 희극이다. 나아가 축제로 변하고 있다. 계엄 반대, 탄핵 시위현장에선 아이돌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젊은이들이 손에 저항의 상징이던 화염병 대신 응원봉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예전 그렇게 무섭던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출렁거렸던 자본 시장은 불과 며칠만에 제자리를 찾았다.

과거와 무엇이 다를까. 우리 나라는 더 이상 개발도상국, 독재국가가 아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을 정권이 밀어부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정권을 잡은 사람들, 정권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법 전문가라는 것이 상당히 영향을 준 듯하다. 상식보다는 법 논리를 앞세웠다. 윤석열 대통령은 법적으로 계엄은 대통령의 권리이자 의무, 나아가 계엄선포는 통치행위로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법 전공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격언이 있다. ‘법은 법 위에서 잠자는 자를 돕지 않는다
(Lex vigilantibus, non dormientibus, subvenit)’. 법적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라는 말이다. 법 전문가 대통령이 그 권리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평생 법은 그의 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번에도 법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 믿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법을 잘 알고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대로 행동해도 범법 문제가 생기지 않을 사람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법을 이용하거나 도움을 받을 일이 거의 없다.
아시아경제

백강녕 디지털콘텐츠매니징에디터 young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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