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재단 (staff@peacefoundation.or.kr)]
비상계엄의 상처
12월 3일 밤 전격 선포된 비상계엄은 2시간 만에 국회의 해제 의결에 이어 6시간 만에 공식 해제되었다. 숨 가빴던 12일간 우리는 물론 전 세계까지 충격적인 대한민국 헌정의 위기를 경험했다. 12·3 비상계엄 결정을 위한 국무회의 소집부터 선포, 그리고 집행의 전 과정이 불법적이었으며, 정상적인 통치행위를 벗어난 헌정질서 파괴 행위라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즉시 190명의 여야 의원이 투표에 참여해 만장일치로 12·3 비상계엄 해제를 결의했으며, 12월 14일에는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켰다.
비상계엄 선포에서 탄핵안 가결까지 모든 과정이 짧은 시간 내에 숨 가쁘게 진행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일파만파다. 우선 국민들의 놀란 가슴이다. 한국 민주주의를 향한 피와 땀의 지난한 여정에는 거의 언제나 비상계엄이라는 독재 정권의 칼날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5.16 쿠테타 이후 군사독재 체제에서 여러 차례 명분 없는 불법적 비상계엄 사태를 경험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국민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비상계엄을 배경으로 권력을 탈취한 독재 체제에 국민들이 항거한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세계사의 유례없는 성공적 민주주의 역사를 기록해온 이 땅에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비상계엄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실시된 초현실주의적 상황에 충격을 받지 않은 국민은 없을 듯하다.
국제사회의 충격도 만만치 않다. 한강의 기적과 세계사에 유례없는 성공적 민주주의 역사의 나라, 지구촌을 매혹시키는 한류의 나라에서 정치 후진국에서나 가능한 비상계엄 사태가 발생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세계인들이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당장 미국은 이례적으로 한국의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 직설적인 비판의 입장을 내놓았다. 12월 4일 미 국무부 부장관 커트 캠벨은 12·3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심각한 오판"(badly misjudged)이라고 직격했으며, 오스틴 국방부장관은 예정된 한국 방문을 취소했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민주주의 진영 간 가치연대를 추구했으며, 윤석열 대통령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강조하며 한·미동맹을 강화해왔다. 윤 대통령이 현안과 과거사를 덮는 파격적인 행보로 한·일관계 개선까지 도모한 명분도 자유민주주의 가치연대였다. 이번 비상계엄 사태는 민주주의 가치를 토대로 미국 중심의 진영을 형성하려는 바이든 정부의 시도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이자 미국 동북아전략의 거점인 한반도의 안정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미국으로서도 충격이라고 할 수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의 여파로 인한 환율 불안정과 세계인의 한국여행 감소 등 경제적 손실은 천문학적 규모로 추산되며, 국가 신뢰도 하락 및 이미지 훼손 등 직간접적 피해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의 유력 경제지인 <포브스>는 지난 6일자 보도에서 "윤 대통령의 이기적인 계엄령 도박에 대한 대가는 5,100만 국민들이 할부로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일갈했다. 우리 국민이 입은 비상계엄의 피해를 한마디로 요약한 셈이다.
조작된 안보위협, 위험한 북풍몰이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주장했다. 계엄 포고령 1호에서 계엄의 목적으로 가장 먼저 적시한 것도 "헌정질서의 수호 및 종북 세력의 척결"이었다.
자신의 비상계엄 선포의 정당성을 주장한 12월 12일 대국민 담화에서도 윤 대통령은 "북한의 불법적인 핵무장과 미사일 위협 도발에도, GPS 교란과 오물 풍선에도, 민주노총 간첩 사건에도, 거대 야당은 이에 동조할 뿐 아니라, 오히려 북한 편을 들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부를 흠집 내기만 했다"며 야당을 종북 세력으로 몰아 세웠다.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지난 10월 평양 상공에 무인기 침투를 지시한 것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라는 제보 내용이 전해졌다. 북한이 대남 오물·쓰레기 풍선을 살포했을 당시 김 전 장관이 "왜 경고사격을 하지 않느냐고 난리를 쳤다"며 국지전을 유도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12·3 비상계엄과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 많은 북한 이슈들이 온라인과 매체의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추후 조사과정에서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일이다.
확실한 것은 윤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 선포의 주요 명분으로 제시한 것이 종북 세력과 북한의 안보적 위협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모든 정황상 비상계엄 선포 시점에 새로운 북한의 특별한 안보적 위협이나 도발은 없었다.
북한은 올해 초 한반도 적대적 2국가론으로 전환한 이후 남한과의 영구적 관계단절 조치를 취했지만 방어적 성격이었으며, 공세적인 무력도발에 나서지는 않았다. 북한의 반복적인 대남 오물·쓰레기 풍선 살포와 GPS 교란도 남측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와 우리 군의 대북 심리전 방송에 대한 대응 성격으로 보인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윤 대통령이 적시한 종북 반국가 세력이 우리 사회와 국가안보의 당면한 위협이라는 그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3대 세습 독재체제를 유지하며 21세기에도 식량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북한이다.
게다가 북한은 전술핵무기 운용부대를 실전 배치하고 틈만 나면 대한민국을 공격하는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여론 조사는 갈수록 북한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젊은이들의 통일문제에 대한 무관심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대한민국 어디에서 종북 추종세력의 위협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만일 종북 반국가 세력이 정말 우리 사회와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면 정부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자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현 정권이 직면한 정치적 위기를 해소하고 헌법이 부여한 야당의 합법적 공세를 일거에 무력화하기 위해 윤 대통령이 안보 위기를 허위로 조작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한반도 평화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을 조작해내고 신북풍 몰이를 통해 윤석열 대통령 자신과 정권 안보를 지키려는 반헌법적 발상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평가를 찾기 어렵다.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월 1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국군의날 시가행진 중 세종대왕상 앞 관람 무대에서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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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일주일간 침묵
남북을 적대적 2국 관계, 전쟁 관계로 전환한 이후 북한은 윤석열 정부 비판에 주력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통상 6면을 발행하며 마지막 6면의 경우 국제동향과 남한 관련 내용을 싣는다. 그동안 <노동신문>은 주 1회 정도 6면의 일부를 할애해 반윤석열 정권 동향을 대남 적개심 고취 차원에서 전해왔으며, 11월 하순 이후에는 보도 빈도가 높아졌다.
특히 12월의 경우 '괴뢰 한국의 서울대학교 교수들 윤석열 괴뢰 퇴진을 요구'(1일), '괴뢰 한국에서 윤석열 괴뢰 퇴진을 요구하는 범국민 항의행동 전개'(2일), '괴뢰 한국 종교인들 윤석열 괴뢰 퇴진을 위한 시국선언운동에 합세'(3일), '괴뢰 한국 단체들 윤석열 퇴진과 파쇼 악법 폐지를 요구'(4일) 등 반윤석열 정권 동향 관련 기사가 매일 <노동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북한은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일주일간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그동안 지속해오던 대남 오물·쓰레기 풍선 살포도 하지 않았다. 북한은 자신들이 주장한 평양 무인기 침투의 한국군 개입설이 보도되었을 때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2004년 5월 14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기각 결정 당시에는 이틀 후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의 보도문이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공개되었다.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 당시의 경우 북한은 <조선중앙통신>, 조선중앙TV 등을 통해서 2시간 20분 만에 신속하게 사실을 보도한 바 있다.
북한 매체들이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남한의 탄핵 정국을 보도한 것은 일주일이 지난 12월 11일이었다. 12월 11일 북한의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은 12·3 비상계엄 사태로 남한 전국에서 100만 명 이상의 군중이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항의행동을 전개하고, 국제사회가 엄정히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21장의 관련 사진과 함께 상세하게 보도했다.
12일에도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은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투쟁이 연일 고조되고 있으며, 정치적 혼란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보도했지만 관련 사진은 게재하지 않았다. 13일 북한 매체는 12·3 비상계엄 사태를 보도하지 않았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일주일간 북한 매체의 침묵은 북한이 상황관리와 함께 전략적 숙고의 기간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 포고의 명분으로 종북 세력과 북한의 위협을 내세운 것은 북한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로 볼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초 이미 남한과 '헤어질 결심'을 확고히 하고 남북관계의 단절을 위한 전방위적 조치를 취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북한은 남한 문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번 12·3 비상계엄 사태에 자신들이 연루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이 자극적으로 행동하거나 무력도발을 할 경우 12·3 비상계엄 선포의 명분으로 작용할 개연성도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남한 대통령 탄핵 사태 또는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민적 저항 동향은 북한에게 양날의 칼이다. 남한 사회의 혼란을 보도함으로써 북한 체제 결속의 효과를 도모할 수 있는 반면, 대통령 탄핵까지 가능한 민주주의의 정치적 자유가 북한 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련 사진 보도 등을 통해 남한 사회의 발전상이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북한 정권에게는 또 다른 역풍이다.
압축적 민주화의 성장통과 한반도 평화의 재인식
명분 없는 반헌법적 발상의 산물인 12·3 비상계엄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로 막을 내렸다. 이제 차분하게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수사 당국의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수사 당국의 공정한 재판 및 수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는 국민적 각성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글로벌 안보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내년 1월에는 노골적인 자국 중심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프 행정부 2기가 출범한다. 밀려오는 외교안보의 파도 앞에서 대통령 리더십 부재의 공백상태를 메우기 위해서는 여야가 초당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해야 하며, 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내각 체제는 오로지 국익과 국민을 위한 국정운영에 힘써야 할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12·3 비상계엄 사태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한강의 기적을 달성했으며, 세계를 매료시키는 한류의 나라로 위상을 정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ECD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이혼률, 최저 수준의 출생률, 사회 양극화, 그리고 이른 고령화 저성장 사회의 진입 등 우리는 압축적 성장의 그늘에 주목해왔다.
우리가 간과한 것은 압축적 민주화의 그늘이었다. 세계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한 자신감 속에서 우리는 시대착오적인 12·3 비상계엄의 가능성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자문할 일이다. 아직도 군사독재의 추억 속에서 헌정질서를 위협하는 반민주적인 잔재들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었던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2·3 계엄의 명분으로 내세운 대한민국에 대한 진정한 위험은 다름 아닌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파괴하려는 우리 일각의 반민주주의 세력이었다는 점을 직시할 일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성찰과 노력이 보다 더 진지하게 요구되는 상황이다.
다행인 것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회복 탄력성이다. 긴급했던 상황 속에서 국회는 불과 두 시간 만에 계엄해제를 만장일치로 결의했으며,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국회로 달려갔다. 일부 12·3 비상계엄에 연루된 군 지휘부 이외의 계엄군은 상황을 모른 채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동원되었을 뿐이며, 시민을 위협하는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번 사태를 통틀어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으며, 이는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기록될 일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대한민국의 저력이며 이를 기반으로 보다 성숙된 민주주의 체제를 완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북핵과 북한의 무력도발뿐만 아니라 우리 안의 반평화세력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번 12·3 비상계엄 사태는 과거 총풍, 북풍 사건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다. 존재하지 않는 안보적 위험을 조작해 내고 국민이 선택한 입법부를 종북 세력으로 몰아 총칼로 무력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경악할 일이다. 그와 같은 위험한 발상을 가진 세력이 극히 소수였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차분하게 한반도 평화의 출발선에 남북이 다시 모여야 한다. 이번 비상계엄의 구조적 배경은 분단체제라는 위험한 고비용구조라고 할 수 있다. 분단체제의 고비용 구조 속에서 남북한이 편할 리 없으며, 북한이 당면한 위기 구조도 분단체제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직시할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번 사태에 대한 진지한 자기반성이며,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것이다. 북한 정권은 속히 반통일, 반민족 인식을 내려놓고 다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과 평화 통일을 향한 긴 로드맵에 동참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를 향한 우보천리의 길에 함께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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