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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사랑이라는 이유로…당신도 혹시 ‘조장’하고 있나요?[북적book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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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인에이블러(사랑한다면서 망치는 사람)’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상대 성장 막는 ‘조장자’

“자기 것이 아닌 책임, 주인에게 돌려줘야”

헤럴드경제

‘인에이블러’ 표지.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인에이블(enable)’은 ‘할 수 있게 하다, 가능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여기에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e)r’을 붙여 만들어진 ‘인에이블러(enabler)’는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좋은 단어일 것 같지만 사실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다. 상대가 계속 의존하도록 만드는 ‘조장자’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을 망치고 있는 사람을 ‘인에이블러’라고 명명한다.

앤절린 밀러의 신간 ‘인에이블러’에는 ‘사랑한다면서 망치는 사람’이라는 부제가 붙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한 행동이 사랑하는 대상을 망친다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교육 및 심리 전문가인 저자는 수많은 심리 이론과 기법, 사례 등을 연구하고 상담해 왔지만, 정작 자신은 이상적인 부모가 되는 데 실패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오랜 시간 발작적으로 재발하는 우울증과 불안증에 시달리는 남편을 챙기고, 분열정동장애가 있는 아들을 보살피며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주변 사람들도 그를 강하고 인내심 있는 사람이라며 높이 평가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희생이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의 성장을 가로막는 방해물이었단 걸 깨닫는다. 가정을 잘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사실은 ‘인에이블러’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대학에 진학해 집을 떠난 딸을 만나러 기차역에 갔을 때의 일이다. 딸이 기차 시간을 확인하러 가자 저자는 게시판을 읽어주려고 아이 옆으로 갔다. 그리고 처음 도시에 왔을 때는 어떻게 해냈느냐고 묻자 딸은 “엄마가 옆에 없을 때는 내가 잘 알아낼 수 있어. 그런데 엄마가 옆에 있을 때는 엄마가 훨씬 효율적으로 하는 것 같으니까 엄마가 하도록 내버려 두는 거”라면서 “엄마 옆에 있으면 내가 무능하게 느껴져”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스스로을 유능하다고 느끼며 성장하기를 바란 저자는 이 말을 듣고 상처를 받는다. 그는 “딸을 한 사람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고 고백한다.

이제는 익숙해진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한다는 뜻이라면, ‘인에이블러’는 상대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각하기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상대가 독립성을 키우지 못하고 더 의존하도록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저자는 자신의 행동이 지레짐작과 불안에서 왔다고 깨닫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도움을 주려는 태도의 기저에는 타인이 나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나의 유용성을 느끼는 낮은 자존감이 깔려 있음을 직시한다.

과도한 책임감을 내려놓기로 결심한 저자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변화시키는 방법부터 소통 전략까지 현실적인 팁을 제시한다. “자기 것이 아닌 책임과 의무는 적법한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인에이블러들이 불안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준다.

인에이블러는 비단 가족뿐 아니라 친구, 연인, 동료 등 다양한 관계에서도 존재한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고, 나와 상대를 성장시키는 건강한 관계를 맺고 싶다면 지금 자신을 둘러싼 관계들이 어떤 모습인지 되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인에이블러/앤절린 밀러 지음·이미애 옮김/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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