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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 (금)

“죽음 앞두고도 ‘인혁당 가족들’ 손잡고 ‘박정희 나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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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 10주기 맞은 제임스 시노트 신부



한겨레

2012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인혁당 전시회’에서 인혁당 희생자 이수병 선생 부인 이정숙(왼쪽부터)씨, 김용원 선생 부인 유승옥씨, 시노트 신부가 김서경 김운성 작가가 제작한 ‘사형수상’을 사이에 두고 사진을 찍고 있다. 이창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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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사제서품 받고 바로 한국행
영종동 주임신부 때 병자 치료 혼신
‘사법살인’ 뒤 교도소 찾아 항의하다
강제로 끌려나가고 추방까지 당해
‘프레이저 청문회’서 박정희 만행 고발





23일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추모식





1975년 4월30일 오후 7시, 김포국제공항에서는 제임스 시노트(1929~2014.12.23) 신부가 출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날까지 국내 체류를 연장하기 위해 노력하던 신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신부는 ‘사랑하는 한국을 떠나면서’라는 성명서를 낭독하고 한국을 떠난다.



뉴욕 출생인 그가 메리놀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은 것이 1960년이다. 한국으로 파견 명령을 받은 날은 4월19일이었다. 사월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그의 부모들은 한국이 위험한 나라라면서 가지 말라고 간곡히 애원하였다. 하지만 신부는 한국에서의 소요는 곧 조용해질 거라며 한국행을 강행하였다.



입국 후 신부는 인천교구에 배치되어 여러 성당에서 사목을 하던 중 1965년에 인천 영종도 성당 주임신부가 된다. 이 성당에서 그는 우선 병원을 설립하고 병원선도 구해 영종도 주변의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덕적도 주민 서재송은 “신부님이 심장병 걸린 네 명의 아이를 미국으로 보내 치료받게 하려 했으나, 출발 직전 한 아이는 죽었고 또 다른 아이 한명은 결핵에 걸려 결국 두 아이만 미국으로 갔다”고 말한다. 그렇게 신부는 ‘아픈 한국인들을 치유하는 천사’와 같은 삶을 살기 시작한다.



1974년 4월에 신부는 어릴 적 골수염을 앓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청년노동자 치료 목적으로 미국행을 알아보려 미8군 공보원 짐 매기를 만나러 용산 미8군 영내로 와 있었다. 신부는 교우 짐 매기 부부로부터 “박정희의 긴급조치는 잘못되었다. 구속된 사람들은 어서 석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형까지 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은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월요일마다 모여 기도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의 인권소식을 국제사회에 알리며 구원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신부도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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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트 신부. 이창훈 제공


그해 7월께 모임에 참석하고 있던 조지 오글(1929~2020) 목사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조작된 것이다.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아내들은 남편을 살려달라는 구명운동을 하고 있다. 심지어 공판 조서도 조작되었다”는 목사의 이야기를 들은 신부는 분노한다. 곧바로 부인들을 만나 구명운동에 참여한다. 11월에는 부인들과 함께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 방한을 반대하고 항의하기 위해 미 대사관 앞에서 기습시위를 벌였다. 12월에는 구명운동을 벌이던 오글 목사가 추방당하는 일도 생겼다. 신부는 목사의 강제 출국을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1975년 1월 정부의 광고탄압에 항의해 투쟁을 벌이고 있던 동아일보 기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투쟁현장을 방문하여 격려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기자였던 김종철은 당시 인연을 바탕으로 신부 사망 1주기를 맞아 ‘제임스 시노트 평전’(바오르딸)을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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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심 무죄판결 뒤 법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시노트(앞줄 다섯째) 신부. 이창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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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국방한 당시 오글 목사와 시노트(왼쪽) 신부. 이창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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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무심했다. 1975년 4월9일 결국 8인의 사형이 강행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신부는 서대문에 있던 서울구치소로 찾아가 유가족을 위로하며 교도소 쪽에 항의하다 강제로 끌려나가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또 장례미사를 드리려는 사형수 송상진의 유가족이 경찰에 의해 제지당하자 응암동 사거리에서 운구차를 사이에 두고 경찰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는 일도 생겼다. 이렇게 하여 목사에 이어 신부도 강제 출국을 당하게 된 것이다.



추방 후에도 아픈 한국을 사랑했던 신부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미국 전역을 돌며 한국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알렸으며, 1977년 미 의회에서 열린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정희의 만행을 증언했다.



1989년 4월9일, 다시 한국을 찾은 신부는 경북대에서 처음 열린 공개적인 인혁당 추모제에 참석했다. 신부는 억울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유화를 자주 그렸는데 그의 그림 속에는 여덟 송이 꽃이 담겨 있었다. 사형수 8인을 뜻하는 것이다. 1994년에는 오글 목사와 함께 방한해 민청학련 사건 20년 기념식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2002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청으로 다시 한국에 와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지부 상주 사제직을 맡아 남은 생을 한국에서 보내기로 한다.



2007년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심재판부는 사형수들의 무죄를 인정한다. 이 자리에 참석한 신부는 “이분들의 죽음은 고귀했습니다”라고 말한다. 2014년 임종이 가까워지자 인혁당 사형수들의 아내들이 그를 찾아 손을 잡았다. 그러자 갑자기 의식을 차린 신부는 “박정희 나쁜 놈” 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2022년 한국 정부는 신부와 오글 목사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오는 23일 오후 2시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신부의 10주기를 기리는 추모식이 열린다.



이창훈/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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