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임윤찬이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과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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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과 천재, 스타와 거장이 줄지어 늘어선 클래식 음악계다. 황제, 전설, 현존 최고 등의 수식도 따라붙는다. 신동으로 태어나 천재적 재능을 떨치다 스타 반열에 올라 거장의 칭호를 얻고 전설로 남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예술가들에게 이런 완벽한 삶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신동과 천재로 주목받다가 이름조차 가물가물해진 연주자들도 많다. 콩쿠르 스타로 빛나다가도 어느 날 연주력이 떨어져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지난 1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 지휘자 파보 예르비가 이끄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과의 협연이었다.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해석이다. 2악장에서 음표를 고무줄처럼 늘이고 당기는 솜씨가 자유자재다. 2019년 그가 윤이상 콩쿠르에서 우승하자 ‘괴물급 신인’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가 ‘괴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1932~1982)를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로 꼽은 게 우연은 아닌 듯하다. 이날 앙코르 곡이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첫 부분이었다. 전곡 연주에 80분이 걸리는 이 대곡을 들고 임윤찬은 내년 유럽과 미국을 순회한다. 독특한 해석으로 이 곡을 널리 알린 피아니스트가 바로 글렌 굴드였다. 신동과 천재가 넘치는 이 동네에서 가장 얻기 어려운 칭호가 ‘괴물’이나 ‘괴짜’ 아닐까. 테크닉뿐만 아니라 확고한 개성과 뚜렷한 철학을 지녀야 얻을 수 있는 호칭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스무살이다.
피아니스트 에프게니 키신의 지난 11월2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독주회. 크레디아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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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피아니스트 에프게니 키신이 3년 만에 내한 독주회를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 바딤 레핀과 함께 러시아 ‘신동 3총사’의 일원이던 그는 ‘피아노의 신’으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키신이 들어서자 환호가 터졌다. 뻣뻣이 서서 상체를 빠르게 숙이는 특유의 ‘쾌속 인사법’이 예전 그대로다. 무적의 테크닉에 엄격히 절제된 타건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 하지만 그에게도 어느덧 연륜이 차오른 모양이다. 베토벤 소나타와 브람스 발라드 연주가 분방하고 자유롭다. 이제 53살이니 거장이란 칭호가 어색하지 않다. 언젠가 전설로 기록될 그의 연주보다 놀라웠던 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천진스러운 표정과 해맑은 미소였다.
이튿날 서울 롯데콘서트홀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무대. 명실상부한 스타 피아니스트다.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협연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일타 강사처럼 명쾌하고, 모범생처럼 반듯한 연주다. 201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이후 탄탄대로를 걸으며 순항 중이다. 베를린 필하모닉 상주 음악가로 활동 중이고, 조만간 라벨의 곡을 담은 음반 2장을 출시하는 등 여러 면에서 꾸준하고 안정적이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11월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독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협연하고 있다. (C) BR / Astrid Ackerman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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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다고 모두 조성진처럼 잘나가는 건 아니다. 2000년 쇼팽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18살)로 우승하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던 중국 피아니스트 윤디리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2015년 내한공연에서 그는 오케스트라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실수를 연발했고, 연주가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쇼팽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했던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다. 무수히 연주했을 곡인데도 악보를 놓치고 까먹은 것은 연습 부족이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그는 나중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사과했다. 이후 공연에서도 연주력이 쇠퇴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2021년엔 성매매 혐의로 현장에서 붙잡히는 등 연주자로서 치명상을 입었다.
조성진에 앞서 2010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러시아 피아니스트 율리아나 아브제예바는 개성 있는 해석이 돋보이는 피아니스트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후 45년 만에 나온 여성 우승자여서 더욱 주목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대회에서 2위, 3위를 했던 잉골프 분더나 다닐 트리포노프에 비해 인지도나 연주 빈도 모두 떨어지는 편이다. 아무래도 두 사람에 비해 테크닉이나 화려함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개성만으론 부족하다는 얘기다. 이 동네에서 꾸준히 스타로 빛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조성진은 12살에 이화경향콩쿠르 초등부에서 우승했는데, 당시 인터뷰에서 “영원한 1등도, 영원한 꼴찌도 없다고 배웠다. 겸손하게 피아노를 공부하겠다”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임윤찬은 밴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서 피아노하고만 사는 게 꿈”이라고 했다. 하루 12시간씩, 때로는 15시간 넘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지독한 연습벌레다. 키신은 내한공연 때마다 ‘하루 7시간 연습시간 확보’를 계약 조건으로 요구할 정도로 연습시간을 챙긴다. 신동과 스타의 유통기간은 결코 길지 않다. 대중의 변덕을 넘어 오래 살아남는 연주자들의 비법은 특별한 게 아니었으니, 바로 부단한 연습, 끊임없는 자기 단련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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