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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 (월)

언더독끼리 뭉쳐 첫 여성우승 일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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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김혜선 기수가 지난 18일 부산 강서구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에서 파트너 글로벌히트와 교감하고 있다. 김 기수는 처음으로 그랑프리에서 우승한 여성 기수다. 렛츠런파크 부산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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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부터 시작한 한국경마 그랑프리는 국내 경마 경주 가운데 가장 높은 권위를 갖고 있다. 유구한 역사는 물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가장 긴 거리인 2300m 경주로 그해 가장 뛰어난 말을 가리기 때문이다. 이달 1일 열린 제42회 그랑프리에서는 경주마 글로벌히트와 김혜선 기수가 우승을 차지했다. 1922년 한국경마 출범 이후 여성 기수가 국내 최고 자리에 오른 것은 102년 만에 처음이다.

지난 18일 부산 강서구 렛츠런파크 부산경남 마방에서 만난 김 기수는 우승 비결을 묻는 질문에 "글로벌히트의 호흡을 달래면서 원하는 대로 달릴 수 있도록 집중했다"며 "오랜 시간 교감을 쌓은 만큼 달리는 동안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고 답했다.

김 기수와 글로벌히트의 한국 제패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성별 구분 없이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경마에서 그는 자신보다 체력과 근력이 강한 남성 기수들에 비해 언제나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글로벌히트가 네 살이 되면서 경주마로서 전성기 초입에 들어섰지만 아직 성장이 더 필요했다.

김 기수는 임기응변과 완급 조절로 불리함을 극복했다. 통상 1800~2000m 장거리 경주에서 경기의 승패는 2분 안팎이면 끝났다. 초 단위로 판단을 내리고 승부를 봐야 했다. 2009년 데뷔 이후 올해까지 쌓은 기수 경험은 경기 판세를 읽고 달려야 할 때 달리는 과감함의 원천이었다. 이번 대회도 마찬가지였다. 초중반에는 중간권에 머물렀지만 승부처마다 치고 나가 마지막 직선 코스에서 역전에 성공했다.

선수 경력 시작부터 부딪혔던 경마계의 유리천장도 김 기수의 자산이었다. 통상 말의 능력 70%, 인간의 능력 30%로 승부가 결정된다는 경마에서 그는 우승권에 있는 말을 쉽게 배당받지 못했다. 기수 양성 과정인 경마교육원을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점도 소용없었다. 말에 대한 공부에 철저했던 까닭이다. 어떤 말이 주어지더라도 습성과 성격을 읽고 장단점을 분석했다. 비인기마를 타고도 입상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지난해부터 호흡을 맞춘 글로벌히트와의 인연도 그렇게 맺어졌다. 2020년 태어난 글로벌히트는 혈통만 따지면 명마 중 명마다. 하지만 가슴이 좁고 다리가 살짝 돌아가 있는 채로 태어나 경주마로서는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을 가졌다. 경주 성적도 들쭉날쭉했다. 2022년 데뷔전에서 첫 승을 거뒀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다 2023년 김 기수를 만나 그랑프리와 함께 한국경마에서 가장 오래된 대회인 코리안더비에서 우승했다. 또 한 번 한국 여성 기수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글로벌히트는 이후 김 기수와 17전 호흡을 맞춰 7번째 대상경주 우승을 기록하며 상금 38억원을 벌어들였다.

김 기수는 "우승보다는 말의 성장을 위해 출전한 대회였는데 깜짝 우승을 해 스스로도 놀랐다"며 "이때 우승을 계기로 글로벌히트와 오랜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말이 성년이 되고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뿌듯하다"고 덧붙였다.

내년 4월 본선 경기를 시작하는 두바이월드컵을 기대하는 이유다. 세계 최고 경주로 꼽히는 이 대회에는 상금 1200만달러(약 168억원)가 걸려 있다. 김 기수와 글로벌히트는 오는 1월 24일 1900m 첫 경기를 시작으로 3월까지 두 번의 예선을 치른다. 이를 위해 다음달 7일 10시간이 넘는 비행길에 오른다. 처음에는 이슬람 국가인 두바이가 여성 기수인 김 기수의 월드컵 출전에 반대했지만 적극적인 설득으로 나갈 수 있게 됐다.

최근 부상에 특히 조심하는 까닭이다. 김 기수는 오른쪽 다리에만 두 차례 전방십자인대 파열 수술, 한 차례 발목 골절 수술을 받았다. 당시 부상으로 은퇴까지 염두에 뒀지만 조교사 공부를 하며 말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그는 "부상을 당하면 글로벌히트와 더 뛰지 못할까봐 겁이 난다"며 "글로벌히트는 국내보다 세계 무대에 더 걸맞은 만큼 기수로서 이번 대회를 침착하게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마를 통해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점도 절감하고 있다. 매년 50여 회 시행되는 대상·특별경주 외에도 연간 1700회가량 매주 열리는 일반경주에 출전하면서 한 번의 승패에 얽매이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 김 기수는 "좋은 일이 생기면 안 좋은 일이 생기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16년간의 기수 생활에서 배웠다"며 "하루하루 주어진 날들을 충실하게 살면 언젠가 기회는 온다"고 강조했다.

[부산 이진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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