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건국때 권위주의 배격
의장,사회자 뜻 프레지던트
흑선에 놀란 일본
위대한 ‘사무라이 두목’
美에 극존칭 大統領 조어
대통령, 용어에 짓눌려
민주리더 아닌 군주선출해
5년마다 처형과 추방
대통령 대신 국가의장 어떤가
반면 조선 왕조는 식민 지배로 어느 순간 눈앞에서 증발했다. 그래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타도의 대상이 아닌 비운의 기억으로 남게 됐다. 36년의 식민지배가 끝나고 조선 민중은 왕 대신 대통령이라는 낯선 명칭의 지도자를 선출하게 됐다. 그 뒤 80년 가까이 민주 공화정의 리더를 직접 선출했지만 ‘위대한 우두머리’라는 뜻의 대통령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에 짓눌렸다. 우린 공화정의 리더를 뽑고 있나, 현대의 군주를 추대하고 있나. 대통령, 대통령으로 계속 떠받들어지면 그 지도자는 자신도 모르게 ‘선출된 군주’로 오염된다. 여기서 한국 대통령제의 비극이 시작된다.
한자 문화권 국가 중 대통령(大統領) 용어를 쓰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중국은 총통이나 링다오(領導)라고 부른다. 영어의 프레지던트(president)가 곧 대통령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프레지던트는 원래 사회자, 의장이라는 뜻이다. 미국은 권위적 의미를 배제하기 위해 건국 당시부터 프레지던트라고 불렀다. 미국에선 국가 지도자도, 기업 회장도, 학생회장과 스포츠클럽 회장도 프레지던트다.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에서 일본은 미국의 프레지던트를 대통령으로 표기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에 '대통령'이란 용어 처음 등장한 것이 이 때였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853년 흑선을 몰고 에도만에 도착한 페리 제독은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왔다. 일본은 이 친서의 ‘프레지던트’를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했다. 처음에는 군주, 왕이라 하려다 ‘사무라이의 우두머리’ 뜻으로도 사용됐던 통령(統領·또는 頭領)에 대(大)를 붙여 ‘대통령(다이토우료)’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위대한(大)이라는 극존칭 의미도 담았다. 철학, 과학, 사회 같은 영어가 한자어로 전환되는 과정이었는데, 대통령은 과장되고 왜곡된 조어였다. 1858년 미·일 수호통상조약 때 공문서로는 처음으로 ‘아메리카합중국 대통령’이 사용했다.
반면 1882년 우리와 미국의 수호통상조약에는 대통령이 아닌 프레지던트 발음을 한자로 그대로 옮겨 ‘백리새천덕(伯理璽天德)’을 사용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몰랐던 일본이 급조한 말 대통령은 임시정부에 이어 우리 헌법에 그대로 차용됐다. 민주국가 미국의 ‘프레지던트’가 태평양을 건너며 왕조 냄새 풍기는 ‘대통령’이 된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말은 일본이 만들었지만 ‘대통령’으로 불리는 리더가 군림하고 통치하는 나라는 한국이다. 아이러니다. 미국, 프랑스, 멕시코, 칠레, 러시아는 발음은 조금씩 달라도 그냥 프레지던트다.
대통령제 유효기간이 다했다는 목소리가 넘친다. 행정 권력과 입법 권력이 불화를 일으켰을 때 발휘됐던 정치와 타협의 지혜도 이젠 소진됐다. 양극단 지지층만 노리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민주주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민주 지도자를 선출해 놓고는 왕의 권위를 부여하고, 5년 뒤에는 처형·추방이라는 형벌을 내린다. 살해되거나 목숨을 끊거나 구속되거나 귀양지에서 소셜 미디어로 소일한다. 대통령 면허정지 사건이 과속운전, 졸음운전으로 끝인 줄 알았더니 음주운전이 추가됐다. 과속운전은 면허정지에서 그쳤고 졸음운전은 면허취소를 당했고, 음주운전은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원문에는 미국의 프레지던트를 한자식 발음으로 백리새천덕(伯理璽天德)으로 표기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기존 질서 붕괴는 새 질서를 만들 기회다. 그러나 권력 8부 능선에 선 듯한 민주당에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그렇게 권력을 잡더라도 5년 내내 ‘범죄자 대통령’이라는 꼬리표로 나라가 두 쪽 나고, 5년 뒤 전임자들처럼 처형·추방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개헌 같은 거창한 말도 필요 없다. 이젠 눈물과 피로 범벅이 된 대통령 대신 우리 지도자를 원래 의미의 ‘프레지던트’와 민주정에 걸맞은 국가의장, 국무의장으로 부르면 어떨까. 일본이 166년 전 급조한 대통령이라는 말의 늪에 빠져 민주정과 봉건왕조 사이에서 우리만 허우적거리고 있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
[정우상 논설위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