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시인 |
올해도 거의 다 저물었다. 돌아보니 꽤 먼 거리를 온 것 같다. 한때에는 슬픔의 폐허에 서 있었고, 한때에는 기쁨의 꽃밭을 가꾸었다. 사람을 떠나보내고 또 사람을 맞이했다.
무산(霧山) 조오현 스님은 시 ‘무설설 2’에서 “동해안 대포/ 한 늙은 어부는// 바다에 가면 바다/ 절에 가면 절이 되고// 그 삶이 어디로 가나/ 파도라 해요”라고 읊으셨는데, 한 해를 더 살고도 이 도리를 아직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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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스님 보며 마음 다진 한 해
촌로들의 평화로운 식사 인상적
새해 시간도 밝음 쪽으로 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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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거센 파도라는 생각에만 매달려 있으니 바다에 가서 바다가 되거나 절에 가서 절이 되지 못했다. 봄에는 푸릇한 새싹과 아른아른하는 아지랑이와 옥토(沃土)가 될 일이요, 여름에는 땡볕과 폭우와 비지땀이 될 일이요, 가을에는 곱게 물든 단풍과 익은 열매와 고독이 될 일이요, 겨울에는 눈보라와 마른 풀과 텅 빈 적막이 될 일인데도 말이다. 계절마다 이 일들이 차 마시고 밥 먹는 일처럼 예사로운 일일 텐데도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아는 척하는 것 자체도 실은 거짓 호기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한 해를 살면서 무엇에든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는 생각은 든다. 격렬한 감정으로부터, 악착을 부리며 더 쥐려는 욕망으로부터, 험한 언어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부터, 이미 벌어졌거나 일어난 일들로부터, 음식과 옷으로부터, 융숭한 대접과 칭찬으로부터, 홀대와 비난으로부터, 수확한 것의 적고 많음으로부터 반 발짝 뒤로 물러선 느낌이다.
아마도 이러한 심경의 변화는 한 스님을 뵌 일이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 스님은 이웃들에게 해마다 때가 되면 쌀을 나눠주는 분이었다. 신도들이 기도하면서 보시함에 넣은, 꼬깃꼬깃한 돈을 조금씩 모았다가 쌀을 사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하고 계셨다. 한 신도가 알려주길, 스님께서는 여름옷 한 벌과 겨울옷 한 벌로 한 해를 나시고, 털신 한 켤레로 네 계절을 사신다고 했다. 스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쌀을 전달한 후에는 전달한 쌀 생각을 하지 않아요. 인연 따라 이뤄지는 것이고, 인연을 만드는 거지요.” 두어 차례 더 찾아뵈었는데, 암 투병을 오래 하셔서 뵐 때마다 기력이 부치시는 것 같았다.
지난 주말에는 시골 고향집에 다녀왔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집 마을은 사방으로 산이 에워싸고 있고, 멀리는 여러 겹으로 된 산이 솟아 있다. 내가 마당에서 늘 바라보았던 산에는 제법 눈이 내려 쌓여 있었다. 늘 그 산으로부터 소낙비가 오고, 산들바람이 오고, 눈보라가 왔다. 나는 ‘어느 겨울 오전에’라는 제목의 졸시를 통해 이렇게 노래했다. 그 일부는 이러하다. “나목이 한그루 이따금씩 나와 마주하고 있다/ 그이는 잘 생략된 문장처럼 있다/ 그이의 둘레에는 겨울이 차갑게 있고/ 그이의 저 뒤쪽으로는 밋밋한 능선이 있다/ 나는 온갖 일을 하느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한번은 나목을 본다/ 또 한번은 먼 능선까지를 본다/ 그나마 이때가 내겐 조용한 때이다” 아마도 이 시를 지은 것도 시골집에서의 이즈음 무렵이 아닐까 싶다.
내가 들른 날은 때마침 동지였다. 어머니께서 다니는 가까운 절에서 새해 달력과 몇 개의 과일과 한 그릇의 팥죽을 보내왔다. 마을회관에 다녀오신 어머니께서 또 팥죽을 갖고 오셔서 오랜만에 팥죽을 먹었다. 동네 어르신들은 마을회관에 모여서 함께 저녁을 지어 드시는데 그날은 어떤 분이 팥죽을 한 솥 끓여 와서 나누었다고 하셨다. 집집에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만 살고 계시니 마을회관에서 저녁을 드시면 덜 적적한 것이 썩 좋다고 하셨다. 주로 뭘 드시느냐고 여쭸더니 국도 커다란 솥에 끓여 먹으니 맛이 더 좋고, 또 시루에 콩나물을 길러 콩나물밥을 자주 해서 드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어울려 지내시면 춥고 긴 겨울밤이 조금은 짧게 여겨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 말씀을 듣고 있으니 신경림 시인이 쓴 ‘겨울밤’이라는 제목의 시가 문득 떠올랐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룟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라고 쓴 시구가 생각났다. 농사를 지으면서 평생을 열심히 살아오신 동네 어르신들의 이 소박하고 평화로운 저녁 식사가 내년에도, 그 이후에도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고, 이번에 보고 들은 고향 마을의 겨울밤 풍경이 인상적인 삶의 모습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가 막 지났으니 점차 낮이 길어질 것이다. 시간은 밝음 쪽을 향해 갈 것이다. 게다가 새해도 곧 밝아올 것이니 묵은 것과 새것의 바뀜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마음의 어두운 구석에도 더 많은 빛을 들이고 살았으면 한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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