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한 시기에 선거관리위원회가 스스로 신뢰를 깎아 먹는 일이 벌어졌다. 선관위는 국민의힘 의원을 '내란 공범'으로 표현한 현수막은 허용하면서 '이재명은 안 됩니다'라는 문구는 불허했다. 사전 선거운동에 해당한다는 이유를 댔다. 이 판단에는 두 가지 정치 편향이 깔려 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돼 조기 대선이 치러지는 것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선 후보가 되는 걸 전제했다. 정치 중립과 공정성 보장 의무를 모두 어긴 것이다.
편파 논란이 제기되자 선관위는 긴급회의를 열고 판단을 번복했다. 선관위가 정치 중립 위반을 사과하지 않은 것은 부차적 문제다. 더 큰 문제는 선관위가 사무총장의 고백대로 "섣부른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현수막 정치'에 대한 선관위 판단의 권위에 상처가 났다. 향후 선거 때마다 현수막 문구를 둘러싼 논란의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선관위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면 처벌하는 법 개정을 시도하면서 재차 도마에 올랐다. 선관위의 정상적인 업무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선관위 법 집행에 대한 신뢰를 훼손할 목적으로 사전투표나 투표 관련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경우 최대 징역 10년, 벌금 3000만원으로 처벌하도록 하는 게 골자다. 선관위는 "선거에 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해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국민적 불안감과 공포심을 자극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을 신설할 필요성이 대두됐다"고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부정선거 음모론이 제지돼야 한다는 입법 취지에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선관위 셀프 성역화법"이라는 일각의 지적에도 일리가 있다. 선관위는 이번 현수막 사건뿐 아니라 앞서 '자녀 채용 비리' '소쿠리 투표' 같은 논란을 일으켜왔다. 다른 누가 시킨 일이 아니다. 모두 선관위가 자초한 일이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악성 루머가 확대 재생산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만 애초 논란의 단초를 만들지 않는 것이 선관위 임무다. 선관위가 우려하는 "국민적 불안감"을 선관위 스스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진영화 정치부 cinema@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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