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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경성 4대 일본계백화점, 조선인 고객 잡기 경쟁… “신여성 꽉 차 성황”[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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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화신백화점 외 4곳이 일본계

미쓰코시-조지야-미나카이-히라다… 청계천 남쪽인 ‘남촌’ 일대에 몰려

조지야 “조선인 고객 본위” 선언

아동복-기성복-잡화 등 품목 보강… 종업원 70%, 고객 60%가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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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반 경성에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주요 백화점만 5개가 있었다. 그중 종로의 화신백화점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계 백화점으로 일본인 중심지인 남촌 일대에 자리 잡았다. 1940년 사진엽서에 담긴 미쓰코시 백화점 전경.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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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반 ‘백화점 시대’

“단연! 백화점시대”(‘부산일보’, 1935년 9월 21일)

1935년 한 신문 기사의 표제이다. 이 기사는 경성의 백화점 발행 상품권 총액이 크게 증가하고 있음을 들어 “최근 경성 상업계의 호경기를 백화점이 리드”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 ‘백화점 시대’라는 것이다. 이런 표현처럼 1930년대 중반 경성에는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주요 백화점만 5개가 존재했다. 그중 종로의 랜드마크 격인 화신백화점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계백화점으로 일본인 중심지인 남촌 일대에 위치했다. 선두 주자는 경성 경제계의 중심인 조선은행 앞 광장의 한 꼭짓점을 차지하고 1930년 지상 4층, 건평 2000여 평의 화려한 매장을 준공한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었다. 일본의 유력한 ‘재벌’ 중 하나인 미쓰이(三井) 계열의 미쓰코시는 당시 유행했다는 “오늘은 제국극장, 내일은 미쓰코시”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일본 본토에서도 1920, 30년대 대도시의 소비대중사회 발달을 상징하는 고급 백화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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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1906년 처음 조선에 진출할 때는 오복점(呉服店·원래 일본 전통의상 제작, 판매점이라는 뜻이나 의미가 확대되어 포목을 중심으로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는 판매점을 뜻함)이었으나 이미 1910년대 중반 ‘백화점’을 표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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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카이 백화점. 현재 호텔스카이파크 명동점 자리에 있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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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정통에 들어서면 미나카이(三中井)와 히라다(平田), 두 백화점이 마주 보고 있었다. 미나카이는 오미(近江) 상인 출신 나카에(中江) 가문의 3형제가 창업했다. 오미 상인은 에도시대부터 간사이 지방 시가(滋賀)현 일대에서 활동한 상인 집단이다. 나카에 형제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세가 뚜렷해지는 것을 기화로 1904년 말 부산으로 건너와 상점을 열었다. 그러나 1876년 개항 이래 이미 많은 일본 상인이 자리 잡은 부산에서 경쟁은 쉽지 않았다. 이들은 다시 근거를 대구로 옮겼다. 경부선이 개통하면서 대구역을 중심으로 일본인이 서서히 모여들고 있는 대구는 신천지인 셈이었다. 1905년 대구에서 잡화점 미나카이를 새롭게 개점한 나카에 형제는 이듬해에는 경남의 중심 도시인 진주에 진출했다. 그리고 병합 직후인 1911년 마침내 경성 본정통에 오복점을 개설했다. 정식으로 백화점을 개점한 것은 1933년이다. 그사이 여러 지역에 지점을 열어 8·15 광복 당시 전국의 미나카이 지점은 12개나 되었다. 히라다 백화점은 히라다 지에토(平田知惠人)라는 사람이 1906년 개점한 작은 생활용품점에서 비롯한다. 히라다 지에토는 초창기 미국 이민자로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20여 년간 일본 잡화점을 경영했다. 히라다도 러일전쟁 승전 소식에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에 진출할 결심을 한 셈이다. 히라다 상점은 목조 2층 건물에 불과했지만 1926년 전격적으로 백화점 개점을 선언했다. 히라다 백화점 개점은 오복점에 만족하고 있던 미나카이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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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경성정밀지도에 표시된 일본계 백화점들(동그라미). 청계천 남쪽인 ‘남촌’ 일대에 몰려 있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조지야, 미나카이, 히라다, 미쓰코시 백화점.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이렇게 백화점이라는 대형 상업 공간이 하나둘 늘어가면서 그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그와 더불어 젊은이를 중심으로 남촌에 출입하는 조선인도 점점 증가하기 시작한다. 화려한 남촌 거리의 유혹은 강렬했던 것이다. 도쿄의 번화가 긴자(銀座) 거리를 산책한다는 의미의 ‘긴부라’(銀ぶら·銀座와 어슬렁어슬렁 산책한다는 뜻의 ぶらぶら의 합성어)를 본뜬 ‘혼부라’(本ぶら·본정 산책)라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이런 풍조가 확산되면서 완연히 눈에 띈 것은 일본계 백화점이 조선인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나서는 현상이었다. “최근에 이르러 일본인 백화점에서 조선인 고객을 끌기 위하여 조선인 소용의 견직물을 비치하고 왕성히 선전함과 같은 것은 조선인 동업자로서는 등한시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조선인 고객을 빼앗는 자 어찌 하나의 백화점에 그치랴. 저 본정통의 화려한 진열장 앞에는 왕왕 조선인이 단집(團集)한 것을 볼 수 있나니 이에 대하여 조선인 상업자로서 자극됨이 없었다면 차라리 기괴한 현상이라 하겠다.”(‘사설: 경성 상업계의 신경향’, ‘조선일보’, 1925년 12월 20일) 일본계 백화점의 ‘마케팅’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혹시 남대문통이나 진고개(본정통)를 지나 보신 분이면 누구나 흔히 눈에 띄는 일이겠지만 조지야, 히라다 같은 큰 상점에는 언제나 조선 여학생, 신식 부인들로 꼭꼭 차서 불경기의 바람이 어디서 부느냐 하는 듯한 성황, 대성황으로 물품이 매출되니 그곳들이 특별히 값이 싸서 그런가요? 그렇지 않으면 무엇에 끌려서 그러는지 알 수 없습디다.”(‘별건곤’, 193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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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코시와 라이벌이었던 조지야 백화점. 현재는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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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고객 유치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백화점은 미쓰코시 백화점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남대문통 대로변의 조지야(丁子屋) 백화점이었다. 조지야도 출발점은 미나카이와 사뭇 비슷하다. 메이지유신 무렵(1867년) 간사이 지방 미에(三重)현의 작은 양복점으로 출발한 조지야는 점차 사업을 확장하여 1885년에는 미에현청의 용달상인(用達商人·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독점적으로 납품하는 상인)이 되었다. 그리고 1904년 부산과 서울에 지점을 개설하여 조선에 진출한 조지야는 일제 통감부 관리, 경찰관의 제복을 납품하게 되면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지야 백화점의 역사에서 1921년은 상징적인 해다. 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경성점을 ‘본점’으로 한 것이다. 사업의 중심을 완전히 식민지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예 “조선인 고객 본위”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정자옥은 창업 60주년 기념으로 사업의 대확장을 계획하여 작년 이래 착착 실행 중입니다. 즉 주단포목부를 신설하여 조선 의복지의 개량에 진력한 것을 위시하여 양품잡화부, 아동복부, 기성복부 등을 증설하여 백화점으로의 개관과 내용을 정비한 것입니다. 더욱이 점내의 모양을 변작(變作)하여 조선인 고객 본위로 들어오기 쉬운 점포의 목표 표준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정자옥은 대경성의 중앙 멘스츠리트 남대문통에 위치하여 조선 상업가에 직면하여 백화점 실현후는 조선인 제위를 위하여 가장 사기에 싸고 좋은 점포로 조선인 고객 우대 방침을 생각할 것은 물론입니다. 현금 도제(徒弟)의 거의 전부는 조선인을 채용하여 조선 본위의 정제품을 공급하며 점원도 반수 이상은 조선인으로써 채용하며 또 다수한 조선인 점원을 양성하여 대백화점 개설을 준비 중입니다.”(‘남대문통에 조선 본위의 대백화점 건설’, ‘동아일보’, 1927년 5월 1일) 실제 전성기 조지야 백화점은 점원의 70%가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또 고객의 60%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이는 일본인 고객이 90% 이상인 미쓰코시와 분명한 대조를 보인다. 일본인 중심 고급 백화점 미쓰코시와 선명하게 대비되는 조선인 중심 서민 백화점의 이미지는 조지야 마케팅의 핵심이었다.

조지야는 이어서 만주로도 진출하여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듬해 1933년 조지야 백화점 신징(新京·만주국의 수도, 현재의 중국 창춘)점을 개점했다. 1935년에는 주식회사 만주조지야를 설립했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조지야의 ‘화려한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의 패전으로 만주에 투자한 거액의 자산을 전부 잃다시피 한 조지야 창업주 일가는 빈손으로 고향 미에현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1956년 조지야라는 이름의 ‘양복점’을 개업하여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근 백 년이 넘는 조지야의 성쇠 드라마는 단지 일개 작은 지방 기업의 역사일 뿐 아니라 근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과 세력 확대, 그리고 패망의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지금도 성업 중인 서울의 한 백화점은 그 역사의 말 없는 증언자로 여전히 우뚝한 것이다.(1920년대 말부터 신축을 준비한 조지야 백화점은 1939년 준공했다. 이 건물은 광복 후 우여곡절을 거쳐 1954년 미도파백화점으로 재개점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로 부도 처리되어 롯데그룹이 인수해 현재 롯데백화점 영플라자가 되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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