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김두규의 國運風水]
아주 오래된 그 예언처럼 새로운 지도자가 나왔으면
화가 황주리(조선일보 전 독자권익위원)가 을사년 새해를 맞이하는 조선일보 독자들을 위해 그린 그림. /황주리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 20일 서울대에서 ‘2024년 후기 사회학 대회’가 있었다. 종교·문화·산업·사회변동 등 다양한 분과별로 사회학자들의 학술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그날 필자는 동양사회사상학회 분과에서 ‘명리학의 육신론에 나타난 집착증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토론을 맡았다. 논문 제목만큼이나 내용이 난삽하여 토론에 참여하지 않으려 하였다. 마땅한 토론자가 없다는 학회 총무의 강권으로 악역을 떠맡았다.
우선 용어 설명부터 어렵다. 학술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발표자가 말한 ‘명리학’은 점술(사주)을 높여 부른 것이다. ‘육신론’이란 나(我)와 타자의 관계, ‘집착’은 탐욕의 다른 표현이었다. 고객들의 사주를 본 결과물을 논문 형식으로 발표한, 좀 황당한 자리였다. 태어난 연월일시를 음양오행으로 환원한 뒤 그 상생·상극 관계를 살펴서 수명의 장단, 부귀와 빈천, 직업의 종류 등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날 토론에서 필자는 독일에서 부전공으로 사회학, 그것도 베버의 종교사회학을 공부하였다고 밝혔다. 점술의 수용과 변천 및 그 영향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이 아닌 ‘사주 홍보물’을 발표하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베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으로 탈주술화(Entzauberung)를 통한 합리주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꼽았다. 베버는 동양의 사주·풍수·관상 등 점술은 세상을 ‘주술 동산(Zaubergarten)’으로 바꾸려는 헛된 시도로 여겼다. 오행은 동양에서 오랫동안 자연 분류의 엄격한 틀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분류 틀이 사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원하는 관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미래에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인간의 소망이 투영되었다. 그러한 사주·풍수·관상을 활용하는 ‘주술사’들이 고객들을 ‘주술 동산’으로 유혹한다는 것이 베버의 생각이다.
이러한 베버의 탈주술화론에 대해 후배 학자들은 ‘근본적으로 현대 사회는 탈주술화된 것이 없다’고 반론을 펴기도 한다. 아니, 탈주술화와 재(再)주술화(Wiederverzauberung)가 병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21세기 경제·문화 대국의 길을 걷는 대한민국 역시 탈주술화와 재주술화가 충돌하는 격랑에 빠져 있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 때도 대한민국을 ‘주술 동산’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 ‘점집[神堂]’에서 작당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다(조선일보 12월 23~24일 자).
문제는 오리엔탈리즘에 경도된 학자들이 사주·풍수·관상 등 점술을 애써 무시하면서도 은근히 그 안에 무엇이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는 점이다. 무시와 기대가 아니라 그 내적 논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비판해야 옳다.
물론 탈주술화만 옳고 주술화·재주술화는 반드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주술 속에는 도참(圖讖)적 성격이 있다. 도참이란 그 “내용과 형식 진위에 상관없이 장래 사실에 대한 예언 암시”를 뜻한다(이병도 ‘고려 시대의 연구’). 밝고 환한 새로운 세상의 조짐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순기능. 도참이 주술화와 만나는 지점이다.
내년은 을사년 뱀[巳]띠 해이다. “진사성인출(辰巳聖人出)”이란 도참(예언)이 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온다. 용[辰]띠 혹은 뱀[巳]띠 해에 성인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금년 용띠 해는 이미 지나갔고, 며칠 후 2025년이면 뱀띠 해가 온다. 진정으로 성인과 같은 새로운 지도자가 나왔으면 하는 소망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필자도 주술의 순기능을 믿고 싶다. 을사년을 맞이하면서 조선일보 독자를 위해 황주리 화가가 그러한 소망을 담은 그림<사진>을 그려 주셨다.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