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리 성공의 전제 조건 '주문 물량'
TSMC도, ARM도 물량 확보해 성공해
인텔엔 유의미한 제삼자 물량이 없어
당시 겔싱어 전 CEO는 인텔을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기업으로 전환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고려 중이었습니다. 지금과 달리 겔싱어 전 CEO가 인텔의 부진을 되돌려 놓을 거라는 투자자들의 기대감도 컸던 상황입니다 .하스 CEO는 이때 겔싱어 전 CEO를 찾아가 "당신들에게는 대량 주문이 필요하다"며 조언했다고 합니다.
하스 CEO에 따르면, 당시 겔싱어 전 CEO는 ARM의 조언을 진지하게 여기진 않았다고 합니다. 하스 CEO는 인텔의 위기를 안타깝게 여긴다면서도, 인텔이 ARM과 협력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며 주장합니다.
인텔의 갈림길, 수직 계열화 vs 협력
팻 겔싱어 인텔 전 최고경영자. AF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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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스 CEO는 인텔에게 '대량 주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을까요. 그리고 대량 주문은 파운드리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현재 인텔은 전 세계에 몇 안 되는 진정한 종합반도체기업입니다. 즉, 반도체 설계와 생산 작업을 한 번에 수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인텔의 반도체 생산 부처인 '인텔파운드리서비스'(IFS)는 사실 독립적인 기업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인텔 파운드리가 받는 주문 물량은 사실상 인텔이 설계한 칩뿐이기 때문이지요. 과거 인텔이 PC부터 데이터센터 중앙처리유닛(CPU)까지 모든 시장을 과점하다시피 했을 때는, 인텔 자체 수요만으로 파운드리를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하스 CEO는 인텔의 진정한 야심이 '선단 반도체의 수직 계열화'에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반도체의 설계부터 생산에 이르는 모든 공정을 다시 거머쥐겠다는 전략입니다. 이 전략을 실현할 수 있었더라면 인텔은 다시 한번 반도체 업계의 거인으로 우뚝 서겠지만, "수직 계열화는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걸린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인텔은 먼저 파운드리 사업부를 성숙하게 해줄 대량 주문을 제삼자에게서 확보해야만 했다는 게 ARM의 진단입니다.
TSMC도 ARM도 '주문 물량' 덕분에 성장
ARM 홀딩스의 르네 하스 최고경영자. 김현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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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 CEO의 주장은 현재 세계 최대의 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의 성공 방정식과 맥이 닿는 면이 있습니다. TSMC 또한 대량 주문을 통해 반도체 생산 공정을 안정화하고 선단 공정 경쟁에서 삼성 파운드리 등 경쟁사를 뿌리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삼성은 과거 2016년 당시 TSMC와 10나노미터(㎚) 공정을 두고 엎치락뒤치락할 만큼 기술력을 인정받는 회사였습니다.
TSMC가 시장 점유율과 기술력 모두 독보적인 기업으로 떠오른 건 10㎚의 벽이 깨진 이후, 애플의 자체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인 A 시리즈와 M 시리즈 주문 물량을 수주하면서부터입니다.
주문 물량이 많으면, 당연히 칩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습니다. 당시 생산 기업 입장에선 생소한 장비였던 EUV 노광기 운전 노하우를 쌓고, 최신 웨이퍼 생산 공정을 최적화하고, 무엇보다도 위탁생산 물량을 맡기는 고객사들과 더욱 밀접하게 협력할 기회가 많아집니다. 수율을 늘리는 게 지상 과제인 반도체 생산에선 주문 물량을 일단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앞서 나갈 수 있습니다.
ARM 또한 '주문 물량'의 위력을 아는 기업입니다. ARM은 일반적인 팹리스와는 달리 반도체 설계의 '기반'이 되는 다양한 지식재산권(IP)을 제공하는 기업이지요. 이 회사의 설계 IP를 재료 삼아 반도체를 만드는 기업들은 셀 수 없이 많으며, 매년 300억개 넘는 ARM 칩이 세상에 쏟아져 나옵니다.
ARM 아키텍처 기반 칩은 수많은 고객사를 확보하고 있으며, 주문 물량 자체가 경쟁력이 된다. 사진은 알리바바의 서버용 ARM 컴퓨터 칩.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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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칩이 고급 로직 프로세서인 건 아닙니다. ARM의 설계 자산 중에는 단순한 마이크로컨트롤러도 있고, 20㎚ 이상의 노드로 개발된 '레거시 공정' 칩도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ARM의 생태계를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ARM이 고객사들과 협력해 개발한 새로운 설계 기법은 라이브러리로 남아 또 다른 고객들을 끌어모읍니다.
하스 CEO는 이런 방식으로 ARM이 인텔 파운드리에 '대량 주문'의 이점을 공유할 수 있다고 제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인텔 파운드리가 ARM과 협력해 반도체를 생산했었더라도 당장 수익이 눈에 띄게 증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수직 계열화 비즈니스와 달리 협력 체계는 전체 수익의 일정 몫을 분담해야 하니까요. 대신 인텔은 파운드리를 키울 때 가장 중요한 '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인텔 파운드리에게는 물량이 없다"
겔싱어 전 CEO가 인텔 부진의 책임을 떠안고 은퇴하면서, 인텔의 미래엔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듯합니다. 만일 인텔의 몰락, 혹은 분사가 정말로 실현된다면 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반도체 산업에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킬 겁니다. 무엇보다도 인텔 덕분에 그동안 CPU 업계를 지배해 온 명령어집합세트(ISA)인 'x86'이 'ARM'에 대체될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으니까요.
미국의 '유일한' 국내 선단 반도체 제조업체라는 점에서, 인텔의 몰락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인텔의 반도체 생산 지부만 분리해서라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다만 이번에도 '대량 주문'이 이런 의견의 발목을 잡습니다.
'칩 워' 저자 크리스 밀러는 지난 11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인텔 파운드리의 독립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수직 계열화를 추구한) 겔싱어의 전략은 인텔의 현실을 반영한 결정에 가깝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인텔 파운드리는 오로지 인텔 자체 제품의 주문 덕분에 존재 가능했다. 사실 인텔 파운드리에는 (제삼자의) 주문 물량이 전혀 없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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