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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 (금)

[유효상 칼럼] 왜 뉴욕증시에 배트맨이 나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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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장 /사진=유효상


1939년 만화에 등장해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슈퍼 히어로 캐릭터로 자리매김한 '배트맨(Batman)'이 얼마 전부터 뉴욕증시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번에 등장한 '배트맨(BATMMAAN)'은 만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 2025년 주식시장을 선도할 8개 빅테크기업들이다. 이들 기업은 최근 2년 동안 전 세계 주식시장을 호령한 매그니피센트 7(Magnificent 7, M7)에 최근 제2의 엔비디아로 불리며 급부상한 브로드컴이 추가된 것이다. 결국 내년에도 M7은 건재할 것이며, 브로드컴의 존재를 주목하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용어다. M8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금년 초부터 12월 30일까지, 배트맨은 평균 74%라는 경이적인 주가 상승률을 기록했다. 회사별로는 브로드컴(B) 146%, 애플(A) 29%, 테슬라(T) 75%, 마이크로소프트(M) 15%, 메타(M) 66%, 아마존(A) 50%, 알파벳(A) 35%, 엔비디아(N) 174% 올랐다. 같은 기간 나스닥은 31%, 다우지수는 14% 상승했다. 참고로 코스피는 -9.3%, 코스닥은 -23%로 극히 부진했으며, 국내 대장주인 삼성전자는 40%나 떨어졌다.

금융시장만큼 신조어를 좋아하는 산업은 없을 것이다. 주로 시대 상황이나 시장의 주도주를 표현한다. 대표적으로 2001년 골드만삭스가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과 같이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를 지칭하기 위해 만든 용어인 BRICs나 한때 과도한 국가 부채에 시달리며 경제 파탄 위기에 몰렸던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을 지칭한 PIGs가 있다. 또한 과도한 투자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FOMO(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나 YOLO(한 번뿐인 인생)와 같이 다른 분야에서 쓰던 용어를 차용해 쓰기도 한다. 또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IBM, P&G, 코카콜라, 맥도날드, 제록스 등 50개 정도의 실적주를 부르는 니프티 피프티(Nifty Fifty)를 시작으로, 2000년대 초반에는 급성장하는 혁신기업을 일컫는 FANG (Facebook, Amazon, Netflix Google)이 만들어졌으며, 작년에는 시장을 주도하는 빅테크기업 7개를 지칭하는 M7이 탄생했다. 그러다 금년 말 브로드컴이 급부상하면서 M7에 브로드컴이 포함된 배트맨이 등장한 것이다.

배트맨의 맨 앞자리의 영광을 차지한 브로드컴은 최근 한 달 동안 무려 51%의 주가 상승률을 보이며, AI 반도체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반면 엔비디아는 1.3%의 제한적 상승에 그쳤다. 월스트리트에서는 브로드컴을 '맞춤 양복점'으로, 엔비디아를 '기성복점'으로 비유한다. 엔비디아는 범용(일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원단'으로 미리 옷을 만들어 팔았다면, 이제 빅테크라는 '큰손 고객'들이 브로드컴에 자신의 체형에 맞는 맞춤 양복을 만들어 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기업들이 AI 핵심 기반시설인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려면 엔비디아의 GPU를 쓰는 것을 상식처럼 여겼으나, 최근에는 특정 작업에 최적화된 맞춤형 반도체(ASIC)에 강점을 갖고 있는 브로드컴이 XPU(eXtreme Processing Unit)를 시장에 내놓으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AI 딥러닝에 최적화된 XPU는 GPU와는 다른 구조로 설계됐으며, 전력 소모가 적고 효율성이 높다는 장점을 무기로 빠르게 시장을 늘리고 있는 것이다. 엔비디아의 주요 고객이던 구글, 메타, 바이트댄스 등 빅테크들이 브로드컴과 손을 잡았고, 계속해서 많은 기업들이 브로드컴과 협업해서 자신만의 칩 개발에 나서고 있다. AI 반도체 시장에서 거침없이 질주하던 엔비디아 GPU의 독점적인 지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가의 투자자들은 배트맨 8개 회사 중, 엔비디아를 금년에 이어 내년에도 시장의 스포트라이트를 가장 많이 받게 될 회사로 꼽았다. 경쟁이 심화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AI 반도체 시장의 90%를 지배하는 기업으로, 2025년 매출도 2000억 달러가 예상되며, 이는 금년 대비 50%가 넘는 높은 성장이다. 매출과 순이익 증가율이 모두 40%를 넘는 회사는 배트맨 8개 중 엔비디아가 유일하다. 다만 비상식적으로 높은 순이익률의 지속 여부와 브로드컴과의 치열한 경쟁을 우려하고 있다. 현재 AI 반도체 시장은 엔비디아의 범용 GPU가 '만능키'처럼 쓰이고 있지만, 너무 비싸게 판매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내년 1월에 끝나는 엔비디아의 2024 회계연도 순이익률은 56.6%에 달한다. 정작 GPU 고객들인 빅테크의 순이익률은 20~30% 수준인데, 하청업체(엔비디아)가 더 높은 마진을 기록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엔비디아의 GPU에 억지로 끼워 맞추느라 고생해온 빅테크들은 브로드컴의 맞춤형 칩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다. 가장 먼저 구글이 브로드컴에 의뢰하여 엔비디아에 비해 아주 낮은 가격으로 자체 칩인 텐서프로세싱유닛(TPU)을 성공적으로 만들었다. 이어 '틱톡'을 운영하는 '바이트댄스'도 브로드컴의 고객이 됐다. 맞춤형 칩 시장이 커지면서 이 분야 선두기업인 브로드컴의 매출과 순이익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 이에 맞춰 애널리스트들이 내년 실적 전망 추정치를 상향하며 최근에 주가가 급등한 것이다. 지난 10월에 마감된 2024년 브로드컴의 순이익률은 24.3%다. 그러나 ASIC 시장의 급성장으로 인한 수혜로 2025년 예상 순이익률은 50.1%까지 급증하면서 엔비디아와 비슷한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또한 브로드컴이 투자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실적 성장과 더불어 꾸준한 배당 증가 때문이다. 2020년 이후 2024년까지 최근 5개년 브로드컴의 현금 배당 증가율은 14%가 넘는다. 이는 엔비디아 11.8%, MS 10.2%보다 높은 수치이며, 테슬라와 아마존과 같이 배당을 하지 않는 기업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무배당 기조였던 메타와 구글이 올 들어 소액이나마 배당금을 주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자산운용사 번스타인은 시장 평균 수익률을 상회할 거라며 브로드컴 매수를 추천했고, 모건스탠리와 뱅크오브아메리카는 브로드컴을 2025년 최고의 반도체 주식으로 선정했다.

한편 배트맨 종목 중 테슬라는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주가도 많이 오르고,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실적 대비 주가가 높은 편이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는 내년 실적 예상은 긍정적이지만 성장률은 다소 둔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메타는 AI 시대에 적합한 맞춤형 광고 실적을 대폭 늘리며, 높은 순이익률과 안정적인 매출 구조를 만들었다. 구글은 양자컴퓨터 개발을 발표하며 장기적인 성장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처럼 '배트맨' 종목들은 각기 다른 매력을 갖추고 있으며, 그동안의 실적 기반과 미래 성장 가능성으로 투자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주식시장의 테마인 인공지능과 긴밀히 얽혀 있다. 중요한 것은 배트맨을 대체할 만한 기업이 당장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도탄에 빠진 도시를 구할 가면 쓴 영웅처럼 배트맨이 내년 주식시장을 늠름하게 지켜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영웅이 존재하는 미국 시장과는 달리 우리나라 주식시장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다. 정치는 불안하고, 경제성장률은 0%대로 떨어지고, 외국인은 물론 개인들도 앞을 다투어 떠나고 있다. 희망이 없는 국내 시장을 떠나 배트맨을 찾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슈퍼 히어로가 절실한 이유다.

새해에는 위기에 빠진 국내 증시를 구원할 K-배트맨의 탄생을 기원한다.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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