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무대 발포사건, 가장 늦게 알아
5년2개월간 고국 그리다 눈감다
입원한 부상 학생 찾아 "장하다" 격려
내가 그만두면 사람들 더 안 다치겠지
12년간 머물렀던 대통령직에서 하야
측근들 건강 위해서 하와이서 요양 권유
신문들 '하와이 망명설' 앞다퉈 다뤄
"나, 하와이에서 잠시 쉬고 돌아오겠소"
4·19 이후 하야 성명을 발표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주변의 권유로 3주간의 요양을 위해 하와이로 출국했다. 경향신문은 비행기에 오르는 이 전 대통령 부부의 모습을 특종보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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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개발도상국 중 70여년 만에 인구 2000만명 이상 선진국으로 진입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최빈국에서 출발해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큰 경제발전을 이룩한 세계 유일의 국가다.
그런 나라를 건국한 대통령이 쫓기듯 망명해버렸다는 역사를 버젓이 기록하고 있는 나라도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승만이 거주했던 이화장에는 모든 짐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망명객의 텅 빈 집이 아닌 것이다. 그는 망명 간 적이 없었다. 다만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뿐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오해는 매우 많지만 가장 큰 오해는 그가 망명했다는 주장이다. 장기집권을 해온 자유당은 집권 여당으로서 창당한 채 권력이양 경험도 없었다. 당시 우리 헌법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각기 선출함으로써 서로 정당이 다를 수 있었으며, 대통령 유고 시 권력은 부통령에게 이양되도록 해 자칫 대선을 치르지도 않은 채 권력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었다. 특히 1960년 3·15선거에서는 이승만의 경쟁자인 조병옥 대통령 후보가 신병 치료차 도미했다가 의료사고로 사망하게 됐다. 이로써 자유당은 단독후보가 되어 당선이 기정사실화된 이승만의 4대 대통령 선거에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다.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44.03%)와 민주당의 장면 후보(46.43%)의 경쟁은 이미 1956년에도 있었지만 이기붕 후보의 경쟁력은 약했다. 선거에서 민주당이 부통령 선거를 이길 경우 84세로 이미 고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임기 내에 유고가 발생하면 권력은 자연히 민주당으로 이동하게 된다. 1957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노쇠현상을 보이고 있었고 치매 초기 증상도 겪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자유당은 조직적으로 관권을 동원해 가며 부통령 선거에 개입하게 됐다. 그 결과 부통령 선거의 결과는 이기붕 79.19%, 장면 17.51%였다. 유권자들은 수긍하지 못했다. 개표소에서 유권자보다 많은 기표용지가 발견돼 유권자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특히 마산에서는 1만여명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유혈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무차별로 최루탄과 실탄을 발포하는 중에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군이 실종됐다. 그의 시신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인 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다. 시위는 삽시간에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를 반공청년단이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4월 19일 오전부터 3만여명의 대학생과 중고생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4·19혁명이었다.
총포 소리가 경무대에까지 들리자 대통령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각하의 당선을 축하하는 축포를 쏘는 겁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비극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 때는 경무대 발포 이후의 일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민 중 가장 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각 총사퇴(4월 21일)가 있고, 허정 외무장관이 과도정부 수반(4월 24일)이 되었다. 그사이 4월 23일 대통령은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부상 학생을 찾아 손을 어루만지다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 "장하다…장하다…젊은이들이 불의를 보고 일어서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 어떻게 백성을 죽일 수가 있어? 내가 그만두면 사람들이 더 안 다치겠지…."
이승만이야말로 전제정치의 불의를 보고 일어나 자유를 향해 평생을 달려온 투사였다. 60여년 뒤 자신이 세운 나라의 청년들이 자신을 향해 불의를 외치며 달려들고 있을 때 이승만은 "장하다"며 격려했다.
이승만은 주변 여러 인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퇴성명서를 작성했다. "국민이 원하니 대통령직을 사퇴하겠다. 3·15 선거를 다시 하겠다. 이기붕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내각제 개헌을 하겠다.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하고자 공산군이 호시탐탐 기다리는 것을 명심하라."
4월 26일 이승만은 12년간 머물렀던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 이화장까지 승용차로 이동했다. 이승만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4·19혁명은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헌정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하는 호헌혁명이었다. 이화장 가는 길의 시민들은 그런 이승만과 이미 화해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노후에 편안하시라" "리박사 하야-만수무강"이라는 벽보를 내걸었다. 이화장 담장 너머로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이승만은 "놀러들 오시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과 반정부 지식인들은 여전히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이승만이 머지않아 망명을 떠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망명설을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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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함께 이화장으로 돌아간 프란체스카 여사는 "일요일에는 정동교회에 가서 교우들과 예배를 봤다. 대통령 건강을 위해 하와이로 가서 몇 주일 쉬고 오는 게 좋지 않으냐는 측근의 제의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것이 하와이로 가게 된 계기였다. 그녀는 "우리는 2주일 내지 한 달 정도 하와이를 다녀올 수 있는 짐을 챙겼다"고 자서전 '대통령의 건강'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5월 중순경 프란체스카 여사가 하와이 출국을 위한 비자 문제로 주한 미대사관과 협의가 마무리되자 이승만의 제자이기도 했던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은 하와이의 오중정 총영사에게 외교행낭 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이 박사님 부부가 3주가량 요양하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는 요지였다. 이승만의 제자 윌버트 최, 최백렬, 그리고 오중정 총영사가 모여 초청장을 보내고 조경사업을 하던 윌버트 최의 별장으로 모셔서 임시로 지낼 수 있도록 준비했다.
5월 28일 저녁 동아일보는 다음 날인 29일자 신문을 발행하면서 "이박사 부처 해외망명설"이란 제하의 기사를 1면에 크게 내걸었다. 가판에서 많이 팔릴 수 있는 자극적인 제목이었다. 경향신문 윤양중 기자는 새벽에 이화장에 가면 큰 기사를 건질 수 있을 거라는 익명의 제보를 받고 달려갔다. 정치 담당 기자가 아니어서 동아일보 기사를 참고했다. 망명할 것이란 기사였다. 윤양중 기자가 사진기자와 함께 신문사 지프를 타고 이화장 밖에서 잠복대기하던 중인 오전 7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보름이나 길어야 한 달 정도 다녀올 짐을 챙긴 채 마당으로 나섰다. 대통령의 옷을 담은 트렁크, 여사의 옷가지와 소품을 담은 트렁크, 점심과 약품 상자가 든 가방, 그리고 평소에 사용하던 타이프라이터가 전부였다. 마당엔 경호관들과 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대통령은 "늦어도 한 달 후에 돌아올 테니 집을 잘 봐 줘"라고 부탁했다.
대통령을 태운 검은 세단이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김포공항으로 달려갈 때 경향신문 기자를 태운 지프만이 뒤를 따라갔다. 공항에는 허정 수반과 이수영 외무차관이 나와 이승만을 배웅했다. 이승만은 허정에게 "나, 하와이에서 잠시 쉬고 아이크가 오기 전에 돌아오겠소"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두고 한 말이었다. 허정은 "염려 말고 푹 쉬고 오십시오"라며 작별 인사를 했다. 당시 비행기는 하와이의 교민들이 비용을 모아서 자유중국 민항기를 전세 낸 것으로, 대통령이 도착했을 때 승무원들은 공항식당에서 식사 중이었다. 출발이 지연되는 사이, 윤양중 기자와 사진기자는 비행기에 올라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이날 오후 경향신문은 호외를 뿌렸다. 저녁의 경향신문 석간은 4면 중 3면 전체를 망명 특집기사로 다뤘다. '이승만 부처 돌연 하와이로 망명' '주인 잃은 이화장, 싸늘하고 빈 무덤 같아' '책상 위엔 펼쳐놓은 성경 한 권만' '저 개 좀 봐 저것만 남았군' '온돌방에는 파리채만 뒹굴어'. 이중 기내에서의 인터뷰 기사도 실렸다.
당시 일간지 85개, 주간지 376개, 월간지 200개로 언론의 자유가 구가되던 시대였다. 모든 언론들이 일제히 윤양중 기자의 기사를 따라 쓰며 이승만 망명을 보도했다. 1896년 협성회회보를 시작으로 최초의 주간 신문사를 창간했고 1898년 4월 최초의 민간 일간지 매일신문을 창간·운영한 언론의 선구자 이승만이었다. 그로부터 60년 뒤 자신의 후배 기자들에 의해 이승만은 필화를 겪게 됐다. 그리고 역사가 돼 버렸다. 이승만은 이역만리 하와이에서 90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5년2개월간을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고국을 그리다 눈을 감았다. 자신이 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지, 사람들이 왜 자신을 망명객이라 부르는지 잘 모른 채로. 이동욱 전 KBS 이사
■ 이동욱 전 KBS 이사 △1959년생 △부산 △서강대 물리학과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석사) △월간조선 기자 △한국갤럽 전문위원 △KBS 이사 △저서 '우리의 건국대통령은 이렇게 죽어갔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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