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유불리 말고 민주주의
지난 38년 권력 구조 개편 번번이 좌초
임기 초반엔 '내 권력 나누기' 인색
임기 후반엔 레임덕에 동력 떨어져
편집자주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의 '내란 사태'라는 역대 최악의 헌정 위기로 한국 사회는 중대한 기로에 놓였다. 인물의 문제인가, 제도의 문제인가, 두 문제가 만난 비극인가. 한국일보는 2025년 신년을 맞아 전문가들과 현행 대통령제 운영 방식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했다. 이를 담은 '대통령제, 새로고침' 시리즈를 3회에 걸쳐 보도한다.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10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2017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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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12·3 불법계엄 선포'가 1987년 현행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요구에 불을 붙이고 있다. 초유의 대통령 내란 사태로 5년 단임 대통령제의 폐단이 여실히 드러난 만큼,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를 보완하거나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만 개헌의 구체적 내용과 시점에 대한 생각은 제각각이다. 특히 윤 대통령의 '어긋난 선택'에 코너로 몰린 여권이 '개헌 스피커'로 나선 반면 야권은 시큰둥하다. 정치적 이해득실이 '개헌 좌표와 시간표'를 재단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지금이 골든 타임"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대통령이 자초한 헌정 위기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 권력 구조 개편을 향한 국민들 관심과 참여 의지가 강한 만큼, 정치적 유불리만 따지던 '38년 개헌 좌초사(史)'의 굴레를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는 지적이다. 이번엔 국민의 뜻을 한데 모은 개헌의 로드맵을 마련, 민주주의 수난사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는 취지다.
임기 초반, "정권 인수도 바빠... 권한 못 잃어"
그간 대통령제 등 권력구조 개편 논의에 가장 큰 걸림돌은 현행 대통령중심제였다. 헌법을 고치려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200명) 이상이 동의해야 하는데, 대통령 입김과 눈치에 여권이 쉽게 움직일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87년 체제에 최임한 8명 대통령 중 스스로 권한을 내려놓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실제 임기 초반, 개헌은 대통령 눈밖에 있었다. 지역주의 타파 등 정치개혁에 관심이 많았다는 평가를 받는 노무현 대통령조차 거리를 둘 정도로, 찬밥 신세였다. '대연정' 제안을 한 게 집권 3년 차였는데, 이듬해인 집권 4년 차에는 아예 "헌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치문화"라고 선을 그을 정도였다. 임기 마지막 해인 5년 차에 들어서 '대통령 4년 연임제' 카드를 꺼내들기는 했지만, 이 역시 정치권 저항에 맥없이 무산됐다. 김대중 대통령 또한 집권 2년 차던 1999년, 공약이었던 '내각제 개헌'을 유보하는 결정을 내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3월 8일 오후 개헌 관련 특별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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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그나마 임기 반환점 이전 대통령제 개편에 관심을 보였다. 집권 2년 차인 2009년 "선거 횟수를 줄이고 조정하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며 개헌의 운을 뗀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그리 적극적이진 않았다. 가끔 개헌 가능성을 언급하는 정도, "필요하다면 국회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수준에 불과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블랙홀' 발언으로 논의 자체를 원천봉쇄했다. 임기 초중반 국회의원 과반이 '개헌추진국회의원모임'에 참여할 만큼 개헌 논의가 활발했는데, 박 대통령은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가 "이원집정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청와대의 불편한 심기에 눌려 "제 불찰"이라고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임기 초 개헌에 나섰던 이는 사실상 문재인 대통령이 유일했다. 집권 2년 차인 2018년 대통령 직속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를 꾸린 뒤, 한달 쯤 뒤 개헌안을 발의했다. 현행 대통령중심제를 유지하되 임기를 4년 연임제로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제의 역사. 그래픽=강준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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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발의를 위한 개헌안'이란 혹평이 쏟아졌다. 당시 여권 인사로 국회 논의에 참여했던 이상민 전 의원 역시 본보 통화에서 "개헌 공약을 지키겠다는, 생색내기용"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정부가 아니라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개헌안 작성을 주도하고, 조국 민정수석이 개헌안을 발표한 것도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키웠다. 대통령이 나서면서, 개헌저지선을 확보하고 있던 자유한국당과의 협상 여지는 좁아졌고 결국 개헌안은 폐지됐다.
임기 후반, "진정성에 의심... 차기 권력이 반대"
임기 초반이 '무관심'이었다면, 임기 후반은 '동력 상실'이었다. 각자의 이유에 따라 적극적으로 개헌을 제안해 보지만 정작 레임덕 등으로 대통령은 힘이 빠지고 그를 지지할 세력도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집권 5년 차에 개헌을 제안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여당의 재보궐 선거 참패와 대통령 지지율 하락에 노 대통령은 이미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열린우리당 등 6개 정당 원내대표가 노 대통령 퇴임 후인 18대 국회에서 개헌하기로 합의하자, 노 대통령은 개헌안 발의를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탄핵 정국을 앞두고 개헌 카드를 꺼냈던 박근혜 대통령, 집권 4년 차에 "여야가 머리만 맞대면 늦지 않다"고 드라이브를 건 이명박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진정성'에 대한 의심도 개헌 추진을 어렵게 했다. 김형오 전 의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부터 역대 대통령들은 임기 후반부에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면서 국면전환용으로 개헌을 제안했다"며 "나라의 기본법을 손대는 문제인데 국면돌파용으로 써먹으니 될 수가 없다"고 비판했다. 여기에 차기 대권주자들이 대통령 권한 축소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도 개헌 논의가 무산되는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노무현(왼쪽부터)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 문재인 전 대통령이 각각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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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주도권 싸움, 툭하면 입장 바꾸기
물론 권력구조 개편이 대통령만의 몫은 아니다. 특히 대통령 권한 축소라는 개헌 명분은 국회의 권한 강화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실상은 국회에서의 논의가 더 활발했다.
그 중심엔 국회를 대표하는 국회의장들이 있었다. 18대 국회부터는 꾸준히 개헌에 관심을 갖고 관련 자문위원회를 구성해왔다. 디테일에 차이는 있지만, 자문위는 대체로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과 국회가 선출한 국무총리가 권한을 분담하는 이원정부제 △4년 중임 대통령제 복수안을 제시했다.
역대 대통령제 개편 제안 및 논의 주요 내용. 그래픽=강준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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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대양당이 정치적 유불리부터 따지면서 별다른 소득이 없긴 매한가지였다. 김재경 전 의원은 "개헌 문제가 터지면 여당은 움츠리고 야당은 적극적이고, 이런 식으로 입장이 항상 변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017년 4월 12일 '대통령 후보의 개헌 관련 의견 청취를 위한 국회 헌법개정특위'에 참석해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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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20대 국회가 개헌 문턱에 가장 가까이 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7년 이후 30년 만에 개헌특위를 구성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계가 주축이 된 자문위의 '4년 중임 대통령제와 6년 단임 이원정부제' 제안은 끝내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당시 회의록을 보면, 야당은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를 문제 삼으며 "어차피 지금 통과시키려고 온 게 아니다"(김진태 의원)라고 단정했다. 여권에 개헌 의지가 없었다는 얘기다. 여당은 야당이 자체안을 내놓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다면서 "6월 13일 지방선거-개헌 동시투표를 하면 투표율이 올라가니까 선거에 불리하다는 정략"(이인영 의원)이라고 비판했다.
"국민 관심 모인 지금이 골든 타임"
전두환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항쟁이 한창이던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로터리에서 열린 ‘국민평화대행진’에서 한 시민이 경찰을 향해 “최루탄을 쏘지 말라”고 외치며 달려 나가고 있다. 3일 뒤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국민직선제를 받아들였다. 고명진 전 한국일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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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결국 정치권이 아닌,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대통령제 개편을 위해선 현재와 같은 정치적 비상사태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재경 전 의원은 "탄핵을 계기로 국민적 관심사를 모아 조기 대선과 개헌을 연계시키려는 움직임이 필요하다"며 "이 모멘텀을 넘기면 또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상민 전 의원도 국민 여론의 중요성을 꼽았다. 그는 "1987년 직선제 개헌처럼 불타오르기가 쉽지는 않다"면서도 "정치권의 정략적 판단을 이길 수 있는 건 국민 여론"이라고 강조했다. △개헌절차법을 만들어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하자는 안(김진표·김종민)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다음 선거부터 적용하는 것을 전제로 논의하자는 안(김종민) △원포인트 개헌으로 차근차근 헌법을 미세조정하자는 안(김영춘) 등도 제기된다.
정략적인 접근이 오히려 개헌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재오 이사장은 "조기대선이 치러지면, 분권형 대통령제를 공약으로 걸고 '나는 임기를 1년만 하고, 2026년 지방선거 때 대선을 같이하자'고 주장하는 후보가 국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1년 후에 대선을 다시 치르자는데 패배한 측도 개헌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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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이서현 기자 here@hankookilbo.com
이지수 인턴 기자 ssu14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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