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이 지면, 바닷물 아래 바닥이 드러난다. 해양 생태계를 구성하는 생명체가 얼마나 다양한지 알게 된다. 물론, 바다를 오염시키는 쓰레기도 함께 나타난다.
역사의 썰물도 마찬가지다. 퇴행과 저항이 오가는 사이, 일상적인 언론 보도에선 잘 드러나지 않았던 사회 진보의 진짜 주인공이 나타날 때가 많다. 이들이 자기 언어를 가질 때,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근대 유럽의 시민혁명이 그랬다. 1980년 5월 광주 이후, 한국 사회 민주화 과정도 비슷했다.
이런 점에서 나는, 2024년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이라는 시대적 퇴행이 역으로 시대적 전진의 기회가 될지 주목한다. 12·3 퇴행 시도가 역으로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해 다시 민주주의를 원상회복하려는 복원력이 발동됨과 동시에, 그 과정에서 기존의 체제에서 잠자고 있던 정치적 역동성과 대중의 민주주의 감수성이 깨어났다. 아울러 기존 권력 엘리트의 한계가 드러나고, 다양한 소수자의 언어가 광장을 메웠다. 또 시위 현장의 문화와 분위기도 달라졌다.
이 같은 변화가 87년 체제를 거듭나게 하는 동력이 될 수 있을까. 1987년 6월 항쟁으로 만들어진 민주 헌정 체제를 ‘87년 체제’라고 한다. 여야 간의 타협으로 직선제 부활을 포함한 선거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구성한 ‘87년 체제’는 양면성을 갖는다. 한편으론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선거민주주의라는 ‘그릇’을 만든 사건이었지만, 그 정치적 그릇에 담긴 내용은 한계가 분명했다.
‘87년 체제’ 한계 뛰어넘어야
그 한계는, 지난 40년 동안 꾸준히 진행된 사회경제적 양극화로 나타났다. 기초 지표에 해당하는 지니계수, 자산소득 대 노동소득의 비율, 상위 1%의 소득 비중, 상위 1%의 부동산 비중 등 모든 지표에서 격차 확대와 양극화가 뚜렷해졌다. 예컨대 1987년과 2023년에 상위 1%가 보유하는 부동산의 비중을 비교해 보면, 1987년에는 약 30%였고, 2023년에는 50%로 크게 증가했다. S 해거드와 S 카우프만은 현대 세계의 민주주의의 후퇴를 16개국 사례를 통해 분석한 책 <백슬라이딩(역행)>(2021)에서, ‘양극화의 치명적 효과’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의 확대가 정치적 극단화를 초래하고,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속화시킨다는 것이다.
나는 양극화의 치명적 효과는 사회적 분리의 고착, 그리고 사회적 병목현상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교육을 중심으로 보면, 단적으로 부모 세대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자녀 세대의 학력 격차로 이어지는 구조가 고착됐다. 이 대표적인 통로가 바로 ‘사교육’이다. 지금의 사교육 산업은 수능 등 입시평가가 요구하는 지식과 역량을 학생 맞춤형으로 만들어 낸다. ‘시험 기반 한국형 능력주의’는 이를 공정한 것으로 믿게 한다. 이 과정에서 중하위계층 자녀의 좋은 재능들은 충분히 계발되지 않는 반면, 중산층 이상 계층 자녀는 과열 경쟁 속에서 문제풀이식 사교육 의존이 심화돼 스스로 공부하는 힘과 창의 역량을 기르지 못한다.
결국 사회 전체에서 동맥경화가 생겨난다. 나는 교육감으로 재직하며 매년 초중고의 ‘배정 갈등’을 경험했다. 안타깝게 반복되는 사례는, 중산층 이상 계층 학부모들이 그들의 자녀가 임대아파트 등에 거주하는 중하위계층 자녀와 같은 교실에서 어울리기를 기피하는 경우였다. 해방 이후의 역사에서 학교 교실은 사회통합을 위한 용광로 같은 역할을 해 왔는데, 사회경제적 격차 확대와 함께 교실을 오히려 계급계층 분리의 현장으로 만드는 압력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교육이 희망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절망이 되어, 부동산 문제와 함께 세계 최고의 저출생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촉진하는 악순환이 나타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저출생의 핵심 요인은 부동산과 교육이다. 저출생의 위기는, 젊은 세대가 지난 민주화 40년에 이르는 동안 악화되어 온 거대한 경제적 양극화와 그와 결합된 사회적 병목들에 대한 좌절들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낮은 출산율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빚어진 ‘정치적 그릇’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표이며, 87년형 민주정이 실질적인 공화정으로서는 균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양한 사회대개혁 공론장 필요
12·3 비상계엄이라는 역사적 썰물 이후 밀물의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그 시간에도 87년 체제의 구조적 한계를 방치한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의 부재가 인구 붕괴를 낳고 다시 사회적 절망을 부르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지속 가능한 내일을 위해서는 이처럼 사회의 선순환을 꽉 막은 동맥경화를 뚫어내는 공화적 대개혁이 필요하다.
검찰과 군인, 관료로 대표되는 기존 권력 엘리트의 한계가 드러난 지금, 누가 대안을 만들어 낼 것인가. 2024년 12·3 비상계엄에 맞서 광장에 나선 이들의 면면은 그보다 훨씬 다양했다. 기존에 조직화된 단체들과 그 성원들은 물론이고, 응원봉을 든 젊은 세대에서부터, 다양한 깃발을 든 소수자들, 농민 등이 대거 참여했다. 중산층 이상 계층이 주도하는 공론장에서 그동안 배제돼 왔던 이들이다. 이제 교육 사회대개혁, 젠더 사회대개혁, 생태환경 대개혁 등을 논하는 다양한 공론장들이 상향식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87년 체제가 빚어낸 ‘정치적 그릇’에서 배제된 다양한 소수자와 약자들의 목소리와 요구가 더 폭넓게 담길 때, 민주주의가 국가 엘리트 선출의 형식으로 형해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주권자의 요구와 기대에 더욱 근접하게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사회화’이다.
지금은 중단된 2000년대 세계사회포럼의 구호는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였다. 2024년 12·3 계엄 이후, 우리는 퇴행을 막는 동시에 또 다른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 |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계엄, 시작과 끝은? 윤석열 ‘내란 사건’ 일지 완벽 정리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