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탄핵에 항공기 참사까지 사회 전체가 침묵에 빠진 시간
그럼에도 희망을 말해야겠다 “나를 살린 건 그래도 다시 한 걸음”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뚜렷한 사계절’은 기후 위기로 경계가 무너지고(솔직히 사계절이 뚜렷한 게 장점인지도 잘 모르겠다), ‘금수강산 옥토낙원’은 기실 자원이랄 게 변변찮은 산악과 분지가 대부분이다. 누대에 이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외침을 당했으니 보따리 잘못 푼 단군 할아버지를 탓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지정학적으로 불리하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라면, 그 이름도 거창하고 거룩한 애국 애족이 아니라 운명애에 가깝다. 이곳에 태를 묻은 필연적인 운명을 감수하며, 행위(doing)보다는 존재(being) 그 자체로 긍정하는 일. 쉽게 말해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이기에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남들보다 인품이 좋고 재산이 많기에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이치와 같다. 못나고 부족해도 내 자식이고 내 부모이고 내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다.
그런데, 지친다. 신년 첫 칼럼을 쓰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지랄 발광 네굽질한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는 물론 사회 전체에 충격의 잔흔이 낭자한 탓이다. 계엄과 탄핵으로 고조된 스트레스가 항공기 참사로 임계점을 넘은 듯 지난 세밑만큼 우울한 때는 다시 없었다. 예측 불가능한 ‘투 다이내믹 코리아’에 욕지기가 났다. 한국 사회에는 애도의 시간이 없고 설득의 언어가 없다. 남 탓과 종주먹, 그리고 진영의 새된 구호만이 있을 뿐이다. 유구무언이요, 침묵만이 가장 현명한 웅변임을 알면서도 마감일에 맞춰 꾸역꾸역 원고를 쓴다.
아시아 여성 최초로 남극점 무보급 단독 도달에 성공한 김영미 대장. /노스페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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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성일지언정 새해를 여는 글에서는 희망을 이야기해야겠다. 문장과 문장 사이, 행간의 절망이 아무리 깊어도 잇몸이 시리도록 사리물고 내일을 말해야겠다. 이 환란 중에 나의 비밀한 위로가 되었던 것은 남극 원정대 홈페이지에서 실시간 위치 추적 시스템을 통해 산악인 김영미 대장의 이동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모두들 허수아비 같은 적과 맞서 싸우고 있을 때 홀로 자신과 쟁투를 벌이며 그녀는 지금도 남극 대륙을 횡단하고 있다. 수많은 기록과 함께 세계적인 산악인의 반열에 오른 김 대장은, 지난 11월 무보급 무지원으로 남극점을 지나 레버렛 빙하까지 도달하는 1700킬로미터의 대장정에 올랐다. 영하 수십 도의 설원을 하염없이 홀로 걷는 고독한 여정이 이삼 일에 한 번씩 SNS에 게시되는데, 그녀는 가도 가도 끝없이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남극의 매력을 ‘정직함’이라고 했다. 특별한 기술 없이 걷고 또 걷는 것이 남극을 온전히 느끼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라고. 그러하기에 고통스러운 여정일지라도 고행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2008년 7대륙의 7번째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때 가져갔던 태극기를 펼쳐 들고 남극점 앞에서 활짝 웃는 사진 속의 김 대장을 따라 나도 웃었다. 어쩌겠는가.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이 난마 같아도, 삶은 정직하게 걸어야만 종착점에 닿을 수 있는 운명의 대륙이 아니런가.
김영미 대장이 좋아한다는 문구는 생텍쥐페리의 자전적 소설 ‘인간의 대지’의 일부이다. “그렇지만 나를 살린 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었어. 다시 한 걸음을, 항상 그 똑같은 한 걸음을 다시 시작하는 것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뎌 하루하루씩 살아내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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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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