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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화)

[김별아의 문화산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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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탄핵에 항공기 참사까지 사회 전체가 침묵에 빠진 시간

그럼에도 희망을 말해야겠다 “나를 살린 건 그래도 다시 한 걸음”

‘지루한 천국’보다는 ‘재미있는 지옥’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등바등하는 안간힘과 왁자지껄한 대소동도 삶의 에너지가 충만한 탓이라 여겼다. 폐허 위에서 일군 번영으로부터 ‘K컬처’의 만개까지도, 이악스럽게 타인과 경쟁하며 자기 몫을 찾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어쩌면 나는 태어나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이 나라를 꽤나 좋아했던 모양이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뚜렷한 사계절’은 기후 위기로 경계가 무너지고(솔직히 사계절이 뚜렷한 게 장점인지도 잘 모르겠다), ‘금수강산 옥토낙원’은 기실 자원이랄 게 변변찮은 산악과 분지가 대부분이다. 누대에 이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외침을 당했으니 보따리 잘못 푼 단군 할아버지를 탓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지정학적으로 불리하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라면, 그 이름도 거창하고 거룩한 애국 애족이 아니라 운명애에 가깝다. 이곳에 태를 묻은 필연적인 운명을 감수하며, 행위(doing)보다는 존재(being) 그 자체로 긍정하는 일. 쉽게 말해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이기에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남들보다 인품이 좋고 재산이 많기에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이치와 같다. 못나고 부족해도 내 자식이고 내 부모이고 내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다.

그런데, 지친다. 신년 첫 칼럼을 쓰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지랄 발광 네굽질한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는 물론 사회 전체에 충격의 잔흔이 낭자한 탓이다. 계엄과 탄핵으로 고조된 스트레스가 항공기 참사로 임계점을 넘은 듯 지난 세밑만큼 우울한 때는 다시 없었다. 예측 불가능한 ‘투 다이내믹 코리아’에 욕지기가 났다. 한국 사회에는 애도의 시간이 없고 설득의 언어가 없다. 남 탓과 종주먹, 그리고 진영의 새된 구호만이 있을 뿐이다. 유구무언이요, 침묵만이 가장 현명한 웅변임을 알면서도 마감일에 맞춰 꾸역꾸역 원고를 쓴다.

조선일보

아시아 여성 최초로 남극점 무보급 단독 도달에 성공한 김영미 대장. /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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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성일지언정 새해를 여는 글에서는 희망을 이야기해야겠다. 문장과 문장 사이, 행간의 절망이 아무리 깊어도 잇몸이 시리도록 사리물고 내일을 말해야겠다. 이 환란 중에 나의 비밀한 위로가 되었던 것은 남극 원정대 홈페이지에서 실시간 위치 추적 시스템을 통해 산악인 김영미 대장의 이동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모두들 허수아비 같은 적과 맞서 싸우고 있을 때 홀로 자신과 쟁투를 벌이며 그녀는 지금도 남극 대륙을 횡단하고 있다. 수많은 기록과 함께 세계적인 산악인의 반열에 오른 김 대장은, 지난 11월 무보급 무지원으로 남극점을 지나 레버렛 빙하까지 도달하는 1700킬로미터의 대장정에 올랐다. 영하 수십 도의 설원을 하염없이 홀로 걷는 고독한 여정이 이삼 일에 한 번씩 SNS에 게시되는데, 그녀는 가도 가도 끝없이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남극의 매력을 ‘정직함’이라고 했다. 특별한 기술 없이 걷고 또 걷는 것이 남극을 온전히 느끼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라고. 그러하기에 고통스러운 여정일지라도 고행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2008년 7대륙의 7번째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때 가져갔던 태극기를 펼쳐 들고 남극점 앞에서 활짝 웃는 사진 속의 김 대장을 따라 나도 웃었다. 어쩌겠는가.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이 난마 같아도, 삶은 정직하게 걸어야만 종착점에 닿을 수 있는 운명의 대륙이 아니런가.

김영미 대장이 좋아한다는 문구는 생텍쥐페리의 자전적 소설 ‘인간의 대지’의 일부이다. “그렇지만 나를 살린 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었어. 다시 한 걸음을, 항상 그 똑같은 한 걸음을 다시 시작하는 것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뎌 하루하루씩 살아내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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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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