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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6 (월)

“아니, 결코, 절대!” 사랑고백했는데 거절 3연타…삶도, 관계도 서툴렀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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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와 가까워지는 법]

136. 반 고흐 3부작 上 : 네덜란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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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일부 확대), 1889, 캔버스에 유채, 65x54cm,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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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새해 첫 주부터 앞으로 3주일간은 매주 토요일,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를 3부작으로 전합니다. 후암동 미술관의 이른바 극장판 형식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빈센트의 생, 빈센트의 글과 말, 빈센트의 그림과 정신을 통해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기사는 1만자 가량입니다. 이 정도 분량은 읽는 데 빠르면 10분, 여유를 가지면 30분 정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구독, 저장, 댓글을 활용한 스크랩 등으로 두고두고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시는 모든 독자분들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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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가 그리고 싶었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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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네덜란드의 화단, 1883, 4월, 패널에 유채, 48.9x66cm, 내셔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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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문 좀 열어보겠소?”

“누구요?”

“나요. 빈센트.”

1884년, 12월의 어느 날.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뇌넨에 있는 농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빈센트. 자네가 여기에 무슨 일인가?” 농부 호르트는 문고리를 풀고 이 무명 예술가를 맞아줬습니다. 헝클어진 붉은빛 머리에 제멋대로 난 수염, 구겨진 셔츠에 거름투성이인 신발…. 빈센트의 이런 행색 탓일까요. 호르트 뒤에 선 가족 모두 그를 경계하는 기색이었습니다.

“창문으로 선생네가 식사하는 모습을 봤소. 아, 아니. 일부러 보려고 그랬던 건 아니오.”

빈센트는 호르트의 눈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꺼낸 모든 단어는 퀴퀴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세차게 고개를 젓고, 어설프게 팔을 흔들 때마다 흙먼지가 흩날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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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네 그루 나무가 있는 가을 풍경, 1885, 캔버스에 유채, 64x89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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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하고 싶은 말이 뭐요?”

호르트가 물었습니다. 빈센트는 그제야 침을 삼킨 뒤 마음속 문장을 내보였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그리고 싶소.” 호르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습니다. “그래. 그러쇼.” 이를 다시 길게 내뱉으며 함께 꺼낸 말이었습니다. 호르트의 두 딸은 아버지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 일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저 아저씨, 왠지 모르게 불쾌하다”고 속닥속닥 말하면, “저 사람은 불쌍한 사람일 뿐”이라고만 답하는 데 대해 의문을 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빈센트는 그날부터 호르트 가족을 지긋이 그렸습니다.

처음에는 각각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런 뒤 당시 먹을거리로 있던 감자, 그다음은 집, 또 그러고는 이웃 농부와 이들의 가족…. 몇 개월간 습작만 50점을 넘게 만들었습니다. 식사하는 농민 가족이 담긴 그림 한 점을 내놓기 위해 생을 갈아넣고 있는 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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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사내의 얼굴, 1884, 37.7x29.5cm, 캔버스에 유채 등,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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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여인의 얼굴, 1884, 42x33.3cm, 캔버스에 유채 등,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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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트의 두 딸은 빈센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버지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이제 막 서른 살을 넘겼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만큼 겉늙었습니다. 거칠고, 초라하고, 비루해보였습니다. 하지만 위험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외양과는 달리, 소문과도 다르게 그 또한 보통 인간이었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평범한 이들보다 더 여리고 순박했습니다. 그는 풀 한 포기에 감동할 줄 알았습니다. 햇빛이 떨어지는 밀밭, 그 위를 유영하는 농부의 노동도 숭고하게 여길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해 다른 예술가들처럼 팔자 좋게 예찬만 하지도 않았습니다. 때로는 농사일을 직접 거들었습니다. 감자 따위를 같이 으적으적 씹어먹고, 천으로 함께 포대 자루를 덧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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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감자 바구니, 1885, 캔버스에 유채, 45x60.5cm,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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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는 종종 그림을 그리다가도 자리를 박차고 나섰습니다.

그런 그는 틀림없이 노을 진 들판 위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북받치는지 흐릿한 해를, 요동치는 구름을, 타오르는 공기를 보며 꺽꺽 울곤 했습니다.

“알겠지? 저 남자는…. 처연한 사람일 뿐이다.” 호르트는 그런 빈센트를 보며 딸들의 등을 토닥이곤 했습니다.

테오에게. 너는 지난 편지에서 ‘도시 화가들이 그린 농민상은 아무리 훌륭해도, 역시 파리 근교의 농민만 생각나게 할 뿐’이라고 썼어. 나도 같은 인상을 받았어. 이는 그 화가들이 인간적으로 농민 생활에 깊이 들어가지 못한 탓이 아닐까 해. 1885년, 4월 13일. 빈센트가.
빈센트는 이 무렵 친동생 테오 반 고흐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빈센트는 이런 생각이었던 겁니다. 수십 점 습작을 그리기를 넘어 같이 농사를 짓는 일,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슬퍼한 일, 마을의 여러 풍경을 보고 관찰하고 감상하는 일 또한 회화를 위한 과업으로 여겼던 겁니다. 오직 딱 한 점의 그림. 말 그대로 ‘영혼의 그림’을 내보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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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오두막 앞에서 땅을 파는 농부 여인, 1885년경, 캔버스에 유채, 31.3x42cm, 시카고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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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빈센트는 절실했습니다.

좋은 예술품을 내놓을 수 있다면 삶의 조각도 팔 수 있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어떤 처지였기에, 무슨 상황을 겪고 있었기에 그랬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 3부작 중 1부, 비로소 화가다운 화가로 첫 발을 디딘 네덜란드 시기를 살펴봅니다.

너무도 이르고 빨랐던 생애 최고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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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불 붙은 담배를 문 해골, 1884~1886, 캔버스에 유채, 32x24.5cm,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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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빈센트가 가진 첫 직업은 화가가 아닌 화랑 직원이었습니다.

한때는 유망한 화상의 길을 걷던 적도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1869년 7월부터 헤이그에 있는 구필 화랑(Goupil & Cie)의 수습사원으로 출근했습니다. 이때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빈센트는 1873년에는 영국 런던 사우샘프턴가에 있는 구필 화랑 런던점으로 몸을 옮기기도 합니다.

일종의 승진을 한 셈입니다. 이때만큼은 빈센트가 그의 아버지보다도 돈을 더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훗날 빈센트를 알리는 데 힘 쏟은 그의 제수는 “그 무렵이 빈센트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짚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무난한 생을 살던 빈센트는 어쩌다 밑바닥을 향해 가게 됐을까요.

한 가지 생각을 열 번씩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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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노란색 밀짚 모자가 있는 정물화, 1885, 캔버스에 유채, 36.5x53.5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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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런던에 온 그 해, 빈센트는 그의 하숙집 딸 외제니 로예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내친김에 청혼까지 해버렸습니다.

여기서 빈센트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빈센트의 삶을 통째로 관통하는 요소, 격정적인 마음입니다.

빈센트는 외골수였습니다. 빈센트는 열 가지 생각을 한 번씩 하지 않고, 한 가지 생각을 열 번씩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의 입장에선 별다른 문제 될 게 없는 언행도 남이 보기엔 ‘갑자기 왜 저럴까’ 싶은 게 많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빈센트는 병적으로 마음이 여렸습니다. 쉽게 상처받고, 빠르게 생채기를 회복할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버림받고 소외되는 이들에 대한 애정 또한 남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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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땅을 파는 농민, 1882, 8월, 30x29cm,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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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불통인 데다 무르고 여린 사람.

겉보기에는 정반대로 보이는 이 모습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알고 보면 두 성향은 단짝처럼 함께 다닐 때가 많습니다. 무언가에 대한 광적인 집착 자체가 마음속 구심점이 약할 때 빚어지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빈센트는 왜 애초에 약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선하고 사려 깊은 천성도 분명 큰 영향을 줬을 겁니다. 아울러 빈센트의 집안 자체에 정신 병력이 있었는데, 그에게 이 증상이 유전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쯤 되면 빈센트의 청혼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빈센트.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에요. …미안해요. 나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걸요.” 외제니의 대답이었습니다.

빈센트는 이 무렵부터 종교에 빠져드는 면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목사였던 만큼 따지고 보면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그런 아버지마저 불안감을 느낄 만큼 심취하는 정도가 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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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사람들(여인들), 1857, 캔버스에 유채, 83x110cm,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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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단순히 이성에게 차였다고 해서 발현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때마침 빈센트는 자기 일에 회의하고 있었습니다. 런던은 분명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한 꺼풀만 들추면 감춰진 실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석탄 때가 잔뜩 묻은 노동자, 자기 키만 한 공구를 들고 낑낑대는 아이들…. 점차 엘리트주의로 수렴하고 있는 지금의 예술이 이들을 온전히 품어줄 수 있는가. 빈센트는 의문의 싹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입바른 말로 그럴듯한 예술품만 팔아대는 일이 점차 질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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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1857~1859, 캔버스에 유채, 55.5x66cm,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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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빈센트가 꽂혀있던 화가, 그는 장 프랑수아 밀레였습니다.

일명 ‘농부들의 라파엘로’로 불린 농촌 화가였습니다. 그의 <이삭 줍는 사람들> 판화 복제본을 화랑에서 본 후 전율을 느꼈다고 합니다.

밀레는 농부와 그의 아내, 물장수와 양치기 등 농촌의 주역이 빚어내는 풍경을 그렸습니다.

꾸밈도, 가식도 없이 시골과 노동에 대한 순수한 애정만을 눌러 담았습니다. 그랬을 뿐인데도 찬란한 작품이 빚어졌습니다. 빈센트는 그에게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군복과 무도회복을 입은 모습만큼, 작업복에 천을 기워 입은 모습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아름답게 꾸며야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추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건져낼 수 있다는 것. 밀레가 이를 자기만의 그림으로 알렸다면 나는 설교를 통해 이를 전하리라. 빈센트는 이런 마음을 품었을 겁니다. 1876년, 3월. 빈센트는 화랑 일을 내려놓습니다.

정작 본인은 추울 때 붕대를 싸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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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성경이 있는 정물, 1885, 캔버스에 유채, 65.7x78.5cm,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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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는 이번에도 생의 한 줄기를 토해내듯 몰입했습니다.

빈센트는 경건한 종교인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빈센트는 어느 선교 단체에서도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교리만 주창하는 빈센트는 주변 이들에게 유연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때때로 울컥하는 모습, 종잡을 수 없는 발작과 조울증 증상 또한 부담스러웠습니다. 빈센트는 결국 스스로에게 질려서, 주변과 환경에 지쳐서 돌아옵니다. 네덜란드의 가족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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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감자를 심는 농부들, 1884, 캔버스에 유채, 66x149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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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빈센트는 우여곡절 끝에 벨기에 보리나주 광산촌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그곳에서 이제 광부처럼 살았습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그에게 주어진 옷과 방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쓰는 것이었습니다. 정작 자신은 추우면 붕대를 싸매고, 졸리면 오두막 짚단 위에 누웠습니다. 보리나주 광산촌은 환경이 열악하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습니다. 빈센트는 이 마을에 있는 동안 여러 일을 겪었지만, 대부분은 불행한 경험이었습니다. 어떤 설교를 하든, 무슨 봉사를 하든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내가 신의 뜻을 잘못 전하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면, 신과 종교라는 것 자체가…. 빈센트는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지요. 마음을 어디로 기울이든, 삶과 가치관에 대한 변화는 불가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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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양배추와 나막신이 있는 정물, 1881, 패널에 유채, 34x55cm,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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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

빈센트는 점점 더 자주 ‘밀레 사부’를 떠올렸습니다. 얼마간은 종교가 예술보다 먼저라고 여겼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교의 반대편 저울에 놓인 게 천박하지 않은 ‘좋은 예술’이라면, 그렇다면 둘 사이 무게는 다를 게 없겠다는 판단도 들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빈센트 또한 목사인 아버지가 아닌, 렘브란트나 밀레의 그림을 보고 울림을 얻은 케이스였습니다. 언젠가부터 눈앞에 화혼이 일렁였습니다. 삽시간이 번진 그것은, 빈센트의 영혼에 새로운 계시를 내렸습니다. 그는 이제 스스로 렘브란트나 밀레같은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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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눈 속에서 나무를 수집하는 사람들, 1884, 캔버스에 유채 등, 67x126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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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에게. 복음 속에 렘브란트가 있고, 렘브란트 안에 복음이 있더구나. 네가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같은 것이야. 내 안에 무언가가 있어. 1880년, 7월. 빈센트가.
스물일곱 살의 빈센트는 그렇게 또 한 번 샛길을 골랐습니다.

빈센트는 정식으로 그림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완전히 어린 나이도 아니었고, 이를 상쇄할 만한 돈다발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시작했습니다. “밀레의 편지에도 늘 그가 봉착한 여러 문제가 보인다. (밀레는)‘그럼에도 나는 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일을 해 나갔다.” 빈센트는 스스로를 격려하듯 이런 문장도 남겼습니다. 그렇게 빈센트는 드디어 화가다운 화가로 첫걸음을 딛는가 했지만….

그에게 사랑은 소금물 같았다
테오에게. 나는 케이를 사랑하게 됐다. 그러나 그녀는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1881년, 11월 3일. 빈센트가.
테오에게. 제발 솔직하게 말해주렴. 왜 내 그림은 팔리지 않는 거니? 돈을 벌었으면 좋겠어. (내 사랑 고백에 대한 케이의)‘절대 안 된다’는 대답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갈 경비가 필요해. (…) ‘아니, 결코, 절대’라고 세 번이나 거절하는 입속으로 뛰어드는 사랑은 씁쓸하고, 씁쓸하고, 또 씁쓸하구나. 1881년, 11월 10~11일. 빈센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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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모자를 쓴 농부, 1884년 12월, 캔버스에 유채, 39.4x30.2cm, 뉴사우스웨일스주 아트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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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는 1881년 초, 부모가 있는 에텐을 찾았습니다.

빈센트는 그곳에 머물며 전원을 그릴 준비를 할 마음이었습니다. 스스로 농촌 화가의 대를 잇기로 마음 먹은 겁니다. 그런 빈센트에게 갑작스럽게 열병이 찾아왔습니다. 지독한 짝사랑에 재차 눈뜨고 말았습니다. 상대는 일곱 살 연상의 이종사촌 코넬리아 키 보스스트릭커. 일명 케이로 불리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빈센트의 편지에서 알 수 있듯, 케이는 빈센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습니다. 케이가 볼 때(물론 다른 사람들이 볼 때도) 빈센트는 너무도 저돌적인 존재였고, 그의 끓어오르는 정열을 뒷받침할 만큼의 믿을 구석도 없었습니다. 케이의 아버지, 당사자인 그녀 모두 빈센트와 거리 두기를 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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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농부 여인, 1884, 1월, 캔버스에 유채, 40.3x30.5cm, 내셔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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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케이를 만나게 해주세요.”

빈센트는 이들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리기도 했습니다. “케이를 데려오지 않으면 제 손을 여기에 집어넣고 있겠어요.” 이런 억지를 부리며 촛불에 손가락을 집어넣은 적도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그러고도 케이를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삶에도, 사랑에도 참으로 서툰 사람이었습니다.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가 사랑을 놓고 보인 볼썽사나운 꼴에 대해선 그저 격정 때문으로 말해두기에는 설명이 부족해보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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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흰색 모자를 쓴 늙은 농부 여인의 얼굴, 1884, 캔버스에 유채 등, 33.3x25.7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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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빈센트의 출생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실, 빈센트 위에는 친형이 한 명 있었습니다. 태어난 날 바로 병으로 죽고 말았지만요. 그리고 1년 뒤 빈센트가 세상 빛을 봤습니다. 그는 죽은 친형의 이름, ‘빈센트’를 그대로 달게 됐습니다. 빈센트의 부모는 허무하게 떠난 직전의 아이를 잊지 못했던 겁니다. 빈센트는 많은 순간 혼란스러웠습니다. 부모가 본인을 두고 죽은 형 빈센트를 투영하고 있는 건지, 오롯이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애정에 굶주린 존재로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고, 살지 않을 것이고, 살아서도 안 된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이런 글을 부치기도 했습니다.

“빈센트, 자네는 타락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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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Woman Winding Yarn, 1885, 캔버스에 유채, 40.5x31.7cm,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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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2월, 빈센트는 헤이그로 몸을 옮겼습니다.

빈센트는 그곳에서 안톤 모베를 찾았습니다. 그는 빈센트의 외사촌이자, 나름의 인정과 실력을 갖춘 화가였습니다. 빈센트는 그런 그에게 유화와 수채화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테오에게. 모베와 이야기라도 나눌 겸 내 그림을 보러 오라고 했지만, ‘다시는 자네를 보지 않겠어. 다 끝이야’라고 딱 잘라 거절했어. 그는 나에게 ‘자네는 타락했어’라고도 했어. (뒤에서 계속)
빈센트의 글 속 내용처럼, 둘 사이 관계는 완전히 파탄나고 맙니다. 얼마 되지도 않은 기간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빈센트의 편지를 조금 더 읽어봅니다.

사랑을 사랑했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지난겨울, 임신한 여자를 알게 됐어. 겨울에 길을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자…. 하루치 모델료를 다 주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눠줘 그녀와 그녀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어. 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병색이 짙어 보여 눈길이 갔어. 목욕을 시키고 보살펴주자 훨씬 건강해졌단다.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때 그녀와 결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그것이 그녀를 계속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1882년 5월 3~12일. 빈센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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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슬픔(시엔), 1882, 종이에 연필과 잉크 등, 44.5x27cm, 뉴 아트 갤러리 월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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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가 그녀로 칭한 이는 클라시나 마리아 시엔 호르니크. 줄인 이름으로 시엔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빈센트는 거짓말처럼 또 사랑에 빠진 겁니다. 상대는 다섯 살짜리 딸을 둔 한 살 연상의 여인이었습니다. 알코올 중독 증세가 있고, 그런 상태에서 재차 임신을 하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다. 그래서 함께 지내며 짐을 나눠서 들고 있다.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주고, 참을 수 없는 걸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일 것이다.” 빈센트는 시엔과 교제하기로 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빈센트는 정말 그의 글처럼, 사랑 없이는 제대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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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난로 근처에 앉아있는 여인(시엔), 1882, 종이에 연필과 잉크 등, 크뢸러 뮐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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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사랑했던 빈센트는, 늘 그랬듯 이번에도 진심이었습니다.

빈센트는 남자이자 화가로, 시엔은 여자이자 모델로 역할을 다했습니다. “나는 이 시들어버린 여인만큼 소중한 조력자를 한 번도 갖지 못했다. 내게 있어서만큼은 그녀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감정이 차오른 빈센트는 이런 글도 썼습니다. “한 번의 선함도 본 적 없는 그녀가 어떻게 선량해질 수 있겠는가.” 그녀의 처지,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이러한 말도 했습니다.

빈센트의 주변 사람은 그가 보이는 행보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사랑에 그렇게 상처받고도 또 사랑을 한다? 심지어 목사의 아들이 거리의 여인과 사실상 동거한다? 빈센트의 부모도, 빈센트의 교사 모베도, 심지어 조력자를 자처한 테오마저도 고개를 저었습니다. 모두가 이별을 권했습니다. 빈센트는 거기에 대고 거듭 자기 뜻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모베가 빈센트에게 실망해 ‘타락했다’고까지 말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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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스카프를 두른 시엔의 딸, 1883, 종이에 연필과 잉크 등, 43.5x25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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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역경을 딛고도 빈센트와 시엔이 피운 사랑은 길지 않았습니다.

너무 가난한 사랑이 일깨운 꽃, 동정과 연민을 토양 삼아 자리 잡은 뿌리가 살아가기에 세상은 척박했습니다. 1883년, 가을. 둘은 헤어졌습니다. 회오리가 한바탕 또 지나갔습니다. 빈센트는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는 또 혼자였습니다.

무엇 하나 잘해낼 수 없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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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감자 껍질을 벗기는 여인, 1885년경, 캔버스에 유채, 40.6x31.8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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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는 돌고 돌아 부모가 있는 땅을 밟았습니다.

빈센트의 아버지는 직업이 목사였던 만큼, 전도를 위해 수시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지금 있는 곳은 뇌넨이었습니다.

빈센트는 그곳에서 다시 예술에 몰두했습니다.

홀린 듯 그림을 그리는 날이 잦아졌습니다. 1884년, 8월. 이웃에 살던 열 살 연상의 여인 마흐호트 베게만은 그런 빈센트에게 호감을 느꼈습니다.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밑도 끝도 없이 청혼하기에도 이르렀습니다. 다만, 그녀는 빈센트만큼이나 불안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빈센트가 내린 답은 거절이었습니다(빈센트는 떨떠름해하는 가운데, 양쪽 집안에서 결사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빈센트는 직전 사랑의 실패로 인해 한 깨달음을 뼈저리게 새겼을지도 모릅니다. 너무도 불안정한 두 사람이 살을 맞대고 살기에 사회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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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감자를 드는 여인, 1885, 캔버스에 유채 등, 41.8x32.5cm,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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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빈센트조차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바람맞은 마흐호트가 제 입에 독극물을 집어넣을 줄은요. 빈센트가 그런 그녀를 급히 병원으로 데려간 덕에 사고가 나지 않았다는 후문입니다.

동네는 두 사람 사이 벌어진 스캔들로 인해 발칵 뒤집혔습니다. 안 그래도 마을 주민에게 놈팡이로 여겨졌던 빈센트는 이 일로 또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빈센트를 보면 한숨만 푹푹 내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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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빨간 리본을 한 여인, 1885, 캔버스에 유채, 60x50.2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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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방황, 좌절….

서른한 살의 빈센트가 지금껏 빚어낸 건 이러한 부정의 말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탓이든, 외부 탓이든 결과는 늘 암담했습니다. 빈센트는 본인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화가의 길을 걷기로 한 이상, 그것은 잘 그려진 그림이 돼야 했습니다.

테오에게. 삶이 공허하고 보잘것없어 보인들, 무의미해 보인들,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기에 쉽게 패배하지 않아.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나아갈 거야.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나아갈 거란다. 1884년, 10월. 빈센트가.
편지에서 짐작할 수 있듯, 빈센트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신을 믿고, 자신을 믿고, 예술을 믿고 재차 나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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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거리의 여인 초상화, 1885, 캔버스에 유채, 35x24cm,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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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개월여 뒤, 허름한 농가에서 감자로 끼니를 때우는 호르트 일가족을 본 겁니다.

빈센트는 이 풍경을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농촌의 현실, 농민의 애환, 이에 더해 인간에 대한 사랑, 현실에 대한 서글픔…. 빈센트는 신 다음으로 추종한 ‘밀레 사부’가 추구한 모든 게 이 한 장면에 담겨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빈센트는 때마침 우연히 본 이 모습에, 그의 영혼을 바칠 준비를 마쳤습니다.

혁명적 발상이 이끈 진정한 농촌 그림
테오에게. 언젠가 <감자 먹는 사람들>이 진정한 농촌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을 거란다. 농부는 교회로 가기 위해 신사복을 차려입었을 때보다, 작업복을 입고 밭에 나가 있을 때가 더 좋아 보여. 농부의 삶을 담은 그림을 전통적 방식으로 세련되게 그리는 건 잘못이야. 1885년, 4월30일. 빈센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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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82x114cm,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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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트 가족이 석유램프의 불빛 아래 빙 둘러앉아 있습니다.

호르트와 그의 아내, 두 딸, 그리고 시어머니로 추정되는 노인 등 다섯 명은 이날 일과를 마친 뒤 저녁을 먹는 듯합니다. 메뉴는 찐 감자, 그리고 차. 그림을 볼 때 곧장 느낄 수 있는 건, ‘이들이 아름답지 않다’는 겁니다. 남편과 아내, 노인 모두 얼굴이 새까맣게 탄 것으로 보입니다. 이마와 두 볼 모두 주름살이 깊이 박혀있습니다. 얼굴을 보이는 딸도 거칠고 투박한 손을 갖고 있습니다. 뒷모습만 보이는, 아마도 막내딸인 듯한 소녀 또한 뒷모습만 봐도 얼마나 여윈 상태일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배경이 어둡고, 붓질 또한 두꺼운 탓에 분위기는 한층 더 가라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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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두 손, 1885, 29.5x19cm,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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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는 호르트 가족을 애써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 ‘보이는 대로’ 그리지도 않았습니다.

빈센트는 이들을 ‘느낀 대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겉모습이 아닌 영혼을 묘사했습니다. 이들의 거칠고 투박한 삶, 그래도 매 순간 성실하게 사랑하고 노동하는 모습을 투영했습니다. 선, 형태, 색채가 모두 강하게 요동치면서도 왜곡된 건 이 때문입니다.

테오에게. 아카데미의 인물화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잘 구성돼 있어. 더는 고칠 곳도 없고, 실수 하나 없이 매끄럽게 그려졌어. 그러나 그런 그림은 우리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끔 이끌어주지 못해. 대상을 변형하고 재구성하고 전환해 그리는 법을 알고 싶어. 그 ‘부정확성’을 배우고 싶구나.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부르겠다면, 그래도 좋아. 하지만, 그 거짓말은 있는 그대로의 융통성 없는 진실보다 더 진실한 거짓말이란다. 1885년, 7월. 빈센트가.
이는 훗날 위대한 발상으로 평가받게 됩니다. 무엇이든 더 멋지고 예쁘게, 우아하고 숭고하게 그린 예술계의 뿌리 깊은 고정관념에 반하는 생각을 한 겁니다. 빈센트는 그렇게 ‘느낀 대로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표현한다’는 현대 미술의 첫 장에 섰습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이 미술사에서 위대한 그림 중 한 점으로 꼽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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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습작, 1885, 캔버스에 유채, 33.5x44.4cm,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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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호그,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캔버스에 유채 등, 72x93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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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는 수개월간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어 만든 <감자 먹는 사람들>을 자식처럼 아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그 누구도 이 그림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동료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는 “여인의 작은 손에서 전혀 사실감을 느낄 수 없다”는 식의 혹평을 했습니다. 테오 또한 난감해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빈센트의 <감자 먹는 사람들>은 한 갤러리에 잠시 걸리기도 합니다. 빈센트의 기대와 달리,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질 않았습니다. “나는 아직 그릴 줄 모르는 것을 항상 그린다. (이를 통해)더 배우기 위해.” 빈센트는 이런 말을 남겼지만, 당장 그에게 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크디큰, 엄청나게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했습니다.

1886년, 3월. 빈센트는 프랑스 파리로 갑니다. 예술의 본거지를 파고들어 만나고, 배우고, 함께 그리기를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서른 셋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4년 4개월뿐이었습니다. ▶1월 11일에 올라올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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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Flying F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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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위즈덤하우스

빈센트 반 고흐, 신의 눈빛을 훔친 남자, 이태호, 마로니에북스

빈센트 반 고흐, 인고 발터, 마로니에북스

반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32가지, 최연욱, 소울메이트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어빙 스톤, 청미래

기자의 말풍선
빈센트의 각 편지 내용은 기사 분량을 위해 임의적으로 줄이고 편집한 부분이 있습니다. 빈센트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오롯이 전달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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