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알아두면 쓸 데 있는
2025년에 담긴 의미
육십갑자에 따라 ‘푸른 뱀의 해’인 을사년(乙巳年) 새해를 기념, 서울 마포구 월드컵공원에 숫자 '2025'를 형상화한 억새뱀 부부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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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숭숭한 연말연시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파탄 난 정국, 팍팍한 살림살이에 안타까운 참사까지… 모두가 말조심, 몸조심하며 살얼음판 걷듯 송구영신 중이다.
2025년 을사년은 어떤 해가 될까. 사람들은 무의미한 정보들을 어떻게든 연결해서라도 의미를 찾으려 한다. 구름 속에서 그리운 사람의 얼굴과 귀여운 동물을 발견해내고, 증시 차트에서 상승 혹은 하락의 패턴을 찾으며, 대형 재난과 정치적 사건 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발굴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해되지 않는 뒤죽박죽 삶, 우연히 찾은 패턴 속에서 통찰을 구하려 노력하면 창의적인 돌파구가 보일 수도 있다. 적어도 긴 고통을 감내하는 마음의 준비는 될 수도.
60년마다 돌아오는 을사년
2025년은 육십갑자에 따른 을사(乙巳)년이다. 육십갑자는 중화권의 전통적 나선형 달력법이다. 십간과 십이지를 순서대로 조합해 총 60개 해가 번갈아 돌아온다. 을사년은 그중 마흔두번 째 해다. 이전 을사년은 1965년, 1905년 등이었다. 특히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의 강렬한 기억 탓에 ‘우리나라는 을사년마다 고초를 겪었다’는 말도 세간에 돈다.
을사늑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하겠다며 외교권을 강제 박탈, 사실상 식민지로 만든 조약이다. 늑약(勒約)은 억지로 맺은 불평등조약을 뜻한다.
1905년 11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해 사실상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 조인 직후, 이토 히로부미 특파대사(앞줄 코트) 등 일본 인사들이 서울 소공동 대관정에서 찍은 사진(오른쪽). /국사편찬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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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은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했지만, 통치력이 약하고 당쟁이 거셌다.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차례로 승리하며 한반도를 포위해 왔다.
쓸쓸하고 스산한 분위기나 매우 가난한 모습을 뜻하는 ‘을씨년스럽다’는 표현도 이 을사늑약 이후 흉흉한 민심을 가리킨 ‘을사년스럽다’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1908년 이해조의 신소설 ‘빈상설’에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처음 나왔기 때문. 일각에선 큰 흉년이 들어 전국적 구휼 사업이 집행된 1785년 을사년에 이 표현이 처음 만들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12월 18일 청와대에서 광복 후 처음 일본과 국교를 회복하고 배상권 등 과거사 문제를 일거 처리하는 내용의 한일협정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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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을사년인 1965년 6월 22일엔 한일청구권협정이 이뤄졌다. 이는 일본의 식민 지배와 강제징용에 대한 우리 측 모든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는 대신, 3억달러의 보상금과 2억달러의 차관을 받고 국교를 정상화한 협정이다. 한일 회담이 시작된 1964년부터 대학생을 중심으로 반대 시위가 일자 박정희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 속 을사년엔 조선 4대 사화(士禍) 중 마지막을 장식한 1545년 을사사화도 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외척 윤씨들 간 내분이 대윤·소윤 갈등으로 번져 대윤 일파가 숙청된 사건이다.
지난 2023년 4월 25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일을 맞아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경귀 아산시장이 공동 친수식을 하고 있다. 충무공은 1545년 을사년에 태어났다. 친수식은 충남 아산 현충사에서 우물물을 길어와 동상을 물로 씻는 행사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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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세계, 제곱수·WTF 밈
역사가 일직선으로 전진한다고 믿는 서기력에서도 특정 연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
지난 연말부터 소셜미디어에선 각국 네티즌들이 2025년이 ‘멋진 연도’일지 ‘저주받은 해’일지를 두고 설왕설래다. 우크라이나와 중동 등 계속되는 각지의 전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귀환 등 불확실성 속에서 어떤 규칙을 찾거나 혹은 방어하려는 심리로 해석된다.
2025년 새해 첫날인 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개선문에서 새해맞이 카운트다운과 함께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2025는 45의 제곱수로, 일생 한번 맞을까 말까 한 '제곱수 연도'란 점이 세계 수학계 등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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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곱수나 거듭제곱은 수학의 아름다움과 규칙성, 우주의 방대함과 무한대까지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 매력 때문에 미국은 비공식적으로 ‘제곱근의 날(square root day)’을 기념한다. 이는 어떤 날짜의 월과 일을 곱해 해당 연도의 마지막 두 자릿수가 되는 날이다. 2009년 3월 3일, 2016년 4월 4일, 2025년 5월 5일, 2036년 6월 6일 등이 해당한다. 이날 미국 학교에선 제곱근 개념을 재미있게 가르치고, 당근·감자 같은 뿌리(root) 식물을 정사각형(square)으로 잘라 먹기도 한다.
반면 MZ 세대를 중심으로 올해가 소위 ‘WTF(What The F***·빌어먹을)의 해’라면서 ‘2025년은 망했어 밈(meme·온라인 유행어)’이 유행하고 있다. ‘WTF 연도’는 1월 1일이 수요일로 시작해 첫 사흘이 수(Wed)·목(Thu)·금(Fri)으로 이어지는 해로, 각 요일 이니셜을 따 이름 붙인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귀환 등 불확실한 국제 정세 속 소위 'WTF 연도'에 대한 공포도 커지고 있다. 코로나 원년인 2020년이나 올해 2025년처럼 1월 1일이 수요일, 즉 첫 해가 수-목-금(W-T-F)로 시작하는 해는 'What the F***(빌어먹을이란 뜻의 욕설)'과 이니셜이 같아 운수가 나쁘다는 설이다. /틱톡 |
그러다 보니 역사 속 ‘저주받은 WTF의 해’가 줄소환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하고 테러 집단 ISIS가 부상한 2014년,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2003년, 아시아 외환 위기가 덮친 1997년, 체르노빌 원전이 폭발한 1986년이 모두 수요일로 시작했다는 것. 해외 MZ판 무속인 셈이다.
반면 새해를 맞은 네티즌 사이에선 WTF의 우울에서 벗어나자며 이를 ‘What The Fantastic year(이토록 환상적인 해라니)!’ ‘Wonderful Things For sure(확실히 멋진 일들이 일어날 거야)’ ‘What The Fun(이렇게 재미있을 수가)’처럼 긍정적인 WTF로 바꾸자는 챌린지도 이어지고 있다.
모든 죄 씻고 제자리 찾기를
올해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25년마다 돌아오는 죄 사함의 해, 희년(禧年·jubilee)이기도 하다. 21세기를 연 2000년 이후 첫 희년이다.
고대 히브리 전통에선 이스라엘 백성이 7년간의 안식년을 7번 지내고 49년이 지난 다음의 해, 즉 50년마다 축제를 열었다. 그 기간엔 노예와 죄수가 해방돼 자유인이 되고, 빚이 탕감되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등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가 나타난다고 한다. 15세기부터 가톨릭교회가 “모든 세대가 최소 한 번은 희년의 은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며 주기를 25년으로 대폭 줄였다.
2025년 가톨릭 희년을 맞아 1월 1일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청동문 중 맨 오른쪽 성문(holy door)이 25년만에 열리고 있다. 희년에는 죄수가 해방되고 빚이 탕감되며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등, 하늘의 자비와 축복이 특별히 나타나는 해로 일컬어진다. /EPA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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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에는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다섯 청동문 중 맨 오른쪽 ‘성문(聖門)’이 열린다. 이 문을 지나며 영적 갱신과 자비의 축복을 누리려는 전 세계 신자와 관광객이 몰린다. 지난해부터 이탈리아 로마와 바티칸은 수천만 명의 순례자를 맞을 준비로 들썩이고 있다.
한편 과학계에선 2025년 태양의 활동이 극대화돼 각종 여파가 나타날 것이란 추측도 나온다. 태양은 약 11년 주기로 흑점 극대기와 극소기를 오가는데, 작년부터 늘어난 흑점 수가 올해 정점에 달해 20여년 만에 가장 센 태양 극대기가 될 전망이다.
태양 활동이 활발해지면 태양 폭풍과 자기장 방출이 늘어난다. 이는 지구에 전자·통신·GPS 시스템 장애를 유발하거나, 인간 수명과 생식 능력, 기후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한다. 현재 태양 활동 주기가 우리에게 유의미한 변화를 끼칠 정도는 아니라는 분석이 많다. 그러나 일각에선 ‘태양 폭발설’ ‘우주 멸망설’까지 거론한다.
2025년 을사년(乙巳年) 첫날인 1일 오전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을 찾은 시민들이 새해 첫 일출을 감상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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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불안한 새해다. 하지만 독일 시인이자 철학자 프리드리히 실러는 “사람은 행운의 시기에 위대해 보일지 모르나, 실제 성장하는 것은 불운의 시기”라고 했고, 영국 소설가 헨리 필딩은 “불행은 그것으로 죽지 않는 이들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했다.
2025년이 을씨년스러울지언정 성찰과 성장, 전환의 시기로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늘의 축복이란 말씀.
[정시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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