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니‧베트남 극장가서 활개 펴는 K-IP
투자 고갈 한국영화 생존형 글로벌 합작
"10억원 초저예산으로 천만흥행 노린다"
인도네시아 흥행 1위에 오른 영화 '7번방의 두번째 기적'. 한국영화 '7번방의 선물'(2013)의 현지 리메이크작이 성공하며 한국에는 없는 속편까지 제작됐다.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지적장애 아빠와 어린 딸이 애틋한 사연이 2편에선 아빠와 엄마의 러브스토리와 감방 동료들의 활약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사진 NEW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달 25일 인도네시아에서 개봉해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는 영화 ‘7번방의 두 번째 기적’. 한국 영화 ‘7번방의 선물’(2013)의 현지 리메이크판 속편이다. 2022년 원작을 현지 무대로 옮긴 1편이, 현지 박스오피스 역대 6위(총 관객 580만명, 이하 NEW 집계)의 흥행을 거두면서 한국에도 안 나온 오리지널 스토리의 속편(3일까지 현지 누적 관객 127만명)까지 개봉했다.
영화 '7번방의 선물'의 한 장면. 사진 NEW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달 21일 현지에서 열린 이 영화 시사회에는 원작의 이환경 감독, 주연 배우 류승룡‧갈소원 등도 초청돼 화제를 모았다. 인도네시아 젊은 세대 사이에 K팝, K뷰티, K콘텐트 등 한류가 주류 문화로 떠오르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한껏 높아진 상황도 한몫했다. 인기에 힘입어 ‘7번방의 선물’은 인도네시아 아동용 애니메이션판도 내년 현지 출시를 목표로 제작 중이다.
━
12년 전 '7번방의 선물' 인도네시아서 속편·애니
인도네시아 영화 '7번방의 두번째 기적'의 현지 개봉(25일)을 앞둔 지난달 21일, 원작 영화 '7번방의 선물'(2013) 이환경 감독과 주연 배우 류승룡(가운데), 갈소원이 현지 시사회 및 레드카펫 행사에 초청됐다. 사진 NEW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 애니메이션은 원작 투자배급사 NEW의 글로벌 판권유통사업 계열사 콘텐츠판다가 전세계 유통권을 획득했다. 콘텐츠판다 이정하 이사는 본지 통화에서 “인도네시아에선 한국영화가 원작이란 걸 포스터에 강조할 만큼 ‘한류’가 성공 키워드”라며 “한국영화 IP(지적재산)가 살아있다는 희망을 보고 왔다”고 말했다. 2억 7000만 인구 대국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영화 IP가 제대로 주류를 장악하면, 한국 시장보다 매출 규모가 커질 수 있다는 예측까지 나온다.
최근 영화시장이 급성장한 동남아시아가 투자 고갈로 기로에 선 한국영화에 새로운 기회의 장으로 부상했다. 특히 한국 자본이 10여년 전부터 진출해온 인도네시아, 베트남에선 지난해 천만 영화 ‘파묘’가 역대 현지 개봉한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을 갈아치울 만큼 한국영화가 거의 실시간으로 각광받는 분위기다. 한국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도 많게는 한해 두세 편씩 개봉한다.
양국 모두 팬데믹 전보다 극장 관객 수가 오히려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도 공통점. 유행에 민감한 젊은 층이 두터운 인구 비중을 차지하며, 빠른 경제 성장을 견인하고 있어서다.
"10억원 초저예산 영화가 천만 흥행"
동남아시아는 제작비가 한국의 10분의 1 수준이다 보니 소위 “10억원 초저예산 영화로 꿈의 숫자 천만 흥행이 가능한” 신흥 시장으로도 통한다. 2022년 연간 관객 수가 팬데믹 전인 2019년(5100만명)을 넘어 역대 신기록(5800만명)을 세운 인도네시아에선, 같은 해 순제작비 150억 루피아(약 13억원)를 투입한 공포영화 ‘무용수 마을의 대학생 봉사활동(KKN di Desa Penari)’이 자국 최초 천만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최근 미국 매체 데드라인 보도에 따르면, 지난 한해 인도네시아 총 관객 수는 9월경 이미 9556만명을 넘어서며 또다시 신기록을 세웠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베트남의 경우, 영화 시장 매출이 지난해부터 2029년까지 4.86%의 연평균 성장률을 기록해 2029년에는 시장 규모가 1억3341만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예측된다.
인도네시아 연간 관객수가 역대 최고를 기록한 2022년 자국 최초 천만 관객을 동원한 '무용수 마을의 대학생 봉사활동(KKN di Desa Penari)'(왼쪽)과 그해 흥행 2위에 오른 조코 안와르 감독의 '사탄의 숭배자 2: 커뮤니언'. 모두 공포영화다.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2023년 인도네시아 영화산업 결산'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 같은 시장 팽창에 발맞춰 한국 영화계의 현지 합작 방식도 진화하고 있다. 과거 한국영화 리메이크 판권을 단순 판매해 소정의 로열티만 받던 것에서, 현지 영화 공동 제작에 참여해 지분을 나눠 받는 비중이 늘었다. 한국 영화사가 현지 진출해 직접 기획‧제작한 ‘글로컬 콘텐트’나, 현지 작품 부분 투자에 참여해 글로벌 배급권을 확보하는 사례도 나온다.
동남아 현지 영화이자 글로벌 IP로서 시장성을 내다보고, 현지 신진 창작자 작품에 투자하는 한국 자본도 생겨났다. ‘기생충’ 제작사 바른손이앤에이가 지난해 해외 배급을 맡은 베트남 영화 ‘돈 크라이 버터플라이’는 베니스영화제(비평가주간), 토론토영화제 등에서 평단에 주목받기도 했다. 업계에선 ‘글로벌 합작 2.0 시대’가 열렸다고 바라본다.
━
한국선 흥행 실패, 동남아 흥행 코드 달랐다
한국과 베트남 합작 영화 '마이'가 지난해 뗏 연휴 베트남 역대 흥행 1위에 올랐다. 사진 CJ ENM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해 말 영화진흥위원회가 주최한 KAFA+ 영화인교육 ‘국제공동제작 현황&글로벌 기금 가이드’ 강연에서 연사로 참여한 글로벌 합작 전문가 이병원 PD(제작사 수퍼스트링 대표)는 “10년 전만 해도 해외에서 현지화를 통한 경험과 인맥을 쌓아야 했다면 팬데믹 이후 OTT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현지인들이 한국 콘텐트를 실시간 소비하고 학습한다”면서 “기존 대기업 진출 위주에서 최근엔 중소 영화사, 독립 PD가 직접 오리지널 IP, 인적 자원을 토대로 해외 시장을 공략하는 글로벌 3.0 시대까지 도래했다”고 짚었다.
공포물과 가족 코미디, 10대 로맨스, 신파 코드가 여전히 강세로 꼽히는 동남아 시장에선 한국에서 외면당한 IP가 부활하기도 한다. 국내 관객 30만명에 그쳤던 안재홍·류덕환·김동영 주연 섹시 코미디 ‘위대한 소원’(2016)이 한 예다. 연출을 맡은 남대중 감독의 신작 로맨틱 코미디 ‘30일’이 지난해 베트남에서 흥행한 걸 계기로, 베트남 스타 배우들을 캐스팅해 ‘위대한 소원’을 한‧베 합작으로 리메이크하는 프로젝트가 추진 중이다. 내년 개봉을 목표로 남 감독이 리메이크판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원작 판권사 콘텐츠판다가 투자 및 공동제작에 참여한다.
영화 '위대한 소원'(2016, 사진)은 베트남에서 내년 개봉을 목표로 한베 합작 리메이크판이 제작되고 있다. 사진 NEW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한국에선 최근 흥행이 부진했던 투자배급사 CJ ENM도 베트남 법인을 통해 현지 국민 감독 겸 배우 쩐탄과 합작한 가족 영화 ‘더 하우스 오브 노 맨’(2023), 로맨스 영화 ‘마이’(2024) 등을 만들어 2년 연속 최대 명절 뗏(Tet, 우리의 설) 연휴 현지 흥행 1위를 경신한 바 있다. 자금줄이 막힌 한국 영화계에서 글로벌 합작은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 수단이 됐다.
━
한국영화 동남아 주류로…IP·인적자원 활성화해야
인도네시아에선 2023년 ‘과속스캔들’(왼쪽부터) ‘헬로 고스트’ 등 한국영화 현지 리메이크작이 잇따랐다. 세번째 사진은 ‘극한직업’(2019)의 베트남판 ‘극이직업’(2022) 포스터. 원작의 치킨집 설정을 현지 국민음식 껌떰(밥에 구운 돼지고기, 야채, 달걀 프라이 등을 곁들인 음식) 가게로 바꿔 흥행을 거뒀다. 사진 각 영화사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자국 영화 보호를 위해 외국인 투자가 금지됐던 인도네시아에선 2016년부터 투자 제한이 대부분 풀린 것도 합작에 불을 붙였다. 또 인도네시아 최대 극장 체인 시네마21(Cinema XXI)이 2023년 ‘귀공자’ ‘더 문’ 등을 필두로 처음 한국영화에 상영관을 내준 것도 한국영화계의 주류 진입에 호재로 작용했다. ‘파묘’가 지난해 현지 260만 관객을 기록하며 역대 한국영화 흥행 1위에 오른 것도 시네마21 상영의 힘이 컸다는 분석이다. 그전까지 1위였던 ‘기생충’(2019)의 현지 관객 70만명을 3배 이상 넘어섰다.
높아진 K콘텐츠 위상을 정부가 글로벌 합작 프로젝트 지원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병원 PD는 “해외에서 한국 창작자, 스태프의 노하우를 배우고 싶어하는 수요가 많다”면서 한국 로케이션 촬영을 중시하는 현행 지원방식에서 벗어나 홍콩‧대만처럼 문화적‧인적 자원과 IP의 선순환 방안을 고민할 필요성이 있다고 촉구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