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다르게 널뛰는 환율
우리 외환 시장에서 하루가 다르게 긴박한 상황이 펼쳐진다. 윤석열 대통령에 이어 한덕수 권한대행마저 탄핵소추 의결로 직무가 정지되는 등 정치·경제 불확실성 확대로 원·달러 환율 변동성이 확산 일로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우려에 정치 리더십 공백 등 다중 악재가 덮친 우리 외환 시장에선 원·달러 환율 1400원대를 넘어 1500원대가 ‘뉴노멀’이 될 수 있단 우려가 팽배하다. 초유의 환율 변동성에 전방위적으로 노출된 산업계는 2025년 사업계획 수립에 비상이 걸렸다.
원·달러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최근 1500원 근처까지 치솟아 2024년 4분기(10~12월) 평균 환율은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에 따르면, 2024년 4분기 원·달러 환율(일일 종가 기준) 평균은 1398.75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금융위기 당시 2009년 1분기(1418.3원) 이후 15년 9개월 만에 가장 높다. 그보다 더 높았을 때는 외환위기 당시 1998년 1분기(1596.88원) 정도다. 2024년 주간 거래 종가(1472.5원)는 연간 종가 기준 1997년(1695원) 이후 27년 만에 가장 높다.
주요 글로벌 투자은행(IB)은 원·달러 환율이 2025년에도 쉽사리 안정세를 찾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을 쏟아낸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서 제출받은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12월 24일 기준 주요 IB의 2025년 1분기 말 환율 전망치 중간값은 1435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2024년 11월 8일 기준 전망치 중간값(1305원)보다 무려 130원 높다. 당시는 계엄 사태 전으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대선 승리가 확정된 직후다. 노무라는 환율이 2024년 2분기 말 1500원을 찍은 뒤 3분기 말까지 그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봤다.
극심한 환율 상승은 대내외 정치경제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환율 단기 변동성 확대 요인은 국내 정치 불안정성 확대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추가 탄핵과 외국인 자금 이탈이 실제로 이뤄질 경우 환율은 1500원을 넘길 수 있다”고 봤다.
환율 상승을 부추긴 국내 거시경제 요인으로는 반도체·자동차 등 주력 산업 부진에 따른 원화 자산 매력도 저하가 첫손에 꼽힌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주력 산업을 바라보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회의적 시선이 확산하는 가운데 정치적 불확실성 확대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것과 진배없단 지적이다. 박석현 우리은행 연구원은 “미국 대비 낮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25년까지 3년 연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1953년 국내 GDP 성장률이 집계된 이후 첫 케이스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당장 우리 수출에서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반도체와 자동차부터 경고음이 요란하다. 중국 기업 침공은 이미 손익분기점(Bep)이 무너진 석유화학 산업뿐 아니라, 반도체 산업으로도 확산 중이다. 자동차 산업은 ‘트럼프 리스크’가 짓누른다.
대외 거시경제 요인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미국 금리 인하 속도 조절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재정·조세 정책으로 법인세·소득세 감세를 추진한다. 정부가 세금을 감면하면서 재정지출을 늘리려면 국채를 더 찍는 수밖에 없다. 시장에 국채 공급이 늘면 채권 가격은 떨어지고 금리는 오른다. 미국 금리 상승은 달러 수요 증가로 이어져 강달러를 부추길 수 있다.
미국 금리 인하 속도 조절도 환율에 주요 변수다. 2024년 12월 8일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에서 연준 위원들은 2025년 두 차례에 걸쳐 금리를 총 0.5%포인트 인하할 것으로 봤다. 2024년 9월 발표 땐 4차례 인하를 예상했지만 속도 조절을 시사한 것이다.
시장에서는 연준이 금리 인하 속도를 늦추려는 배경으로 중립금리 상승을 지목한다. 중립금리는 경제가 과열되거나 침체되지 않고 잠재성장률을 달성하도록 하는 금리다. 실질 중립금리는 명목 중립금리에서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뺀 것으로, 각국 중앙은행이 정책금리 적정성을 판단하는 잣대로 쓴다. 즉, 경제 구조적 요인 변화로 실질 중립금리가 높아지면 인플레이션율이 각국 중앙은행 목표치인 2%로 떨어지더라도 이상적인 경제를 가능케 하는 금리 수준이 이전보다 더 높아진단 의미다. 결국 2022년과 2023년 급격한 금리 인상에도 경제가 견고하자 연준 위원들이 중립금리가 올라갔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시장은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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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악재 덮친 외환 시장
환율 변동성 관리 비상
고환율이 지속되면서 금융당국의 환율 방어 여력을 우려하는 시선도 확산하고 있다. 한국은행 외환보유액은 하락세를 거듭해 최근 4000억달러 선에 근접했다. 한은은 계엄 사태 여파로 환율이 계단식 상승을 반복할 때마다 외환보유액을 일부 헐어 달러를 매도하는 방식으로 시장에 개입(스무딩 오퍼레이션)해온 것으로 파악된다. 외환 시장에서는 외환보유액 앞자리 숫자가 ‘3’으로 바뀔 경우 시장에 단기 충격 요인이 될 가능성을 우려한다.
다만, 고환율에 따른 외환위기론은 현재로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한국이 외국에서 받을 돈이 줄 돈보다 많은 순대외채권국이라는 점부터 1998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다르다. 국민들이 보유한 달러도 상당하다. 문정희 KB국민은행 연구원은 “경상수지가 8000억달러 흑자고 순대외채권도 2000억원이 넘어 외환보유액까지 합치면 6000억~7000억달러 수준”이라며 “외환보유액이 3000억달러대로 떨어지더라도 외환 시장에 문제가 될 것 같지 않다”고 전했다.
산업계는 환율 변동성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에 따르면, 환율이 10% 상승할 경우 국내 제조업 평균 제조원가는 4.43% 상승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동일 조건에서 국내 전 산업 평균 제조원가 역시 2.98% 상승하는 것으로 연구원은 분석했다.
고환율이 수출 기업에 호재라는 공식도 더는 통하지 않는다. 환율은 크게 영업이익과 순이익에 영향을 미친다. 환율 상승으로 원자재 가격이 올라 제조원가는 오르지만 달러로 벌어들인 이익을 원화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영업이익이 상승한다. 수출 비중이 큰 제조 업종이 여기에 속한다. ‘고환율=호재’ 등식이 나온 이유다. 그러나 수출선 다변화로 미국 외 시장에서 현지 통화 판매 비중이 커져 이런 수혜는 줄었다. 오히려 순이익 측면에서 고환율은 우리 기업 대부분에 악재다. 최근 수년간 반도체와 2차전지 업종에선 공장 증설 등으로 미국 현지 투자가 크게 늘었다. 이들 업계는 현지 자금 조달 과정에서 달러부채 증가로 외화부채 상환 부담이 커질 수 있다. 달러부채가 많을 때는 회계상 손실이 생긴다.
외환당국은 외환보유액을 활용한 직접 개입과 국민연금 등을 통한 간접 개입을 병행하며 환율 방어에 나선다. 근본적으로는 산업 구조 개혁을 통한 생산성 혁신이 갈급한 과제다. 미시적으로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주주환원 정책 확대로 자본 시장 매력도를 제고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92호 (2025.01.08~2025.01.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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