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의원(흰옷)과 김기현 의원(나 의원 오른쪽)을 비롯한 국민의힘 의원 등이 지난 6일 대통령 관저 앞에서 입장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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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넘어 좌절과 무기력을 겪은 지난 한 달이었다. 공공의 이익과 모순되지 않도록 권력을 행사해야 할 국가 최고 권력자가 "나부터 살고 보자"는 식의 시대착오적 계엄 발동으로 국가 안보와 민생을 순식간에 최악의 위기로 몰아넣은 과정을 실시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윤석열 대통령의 셀프 쿠데타는 다행히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 대통령이 스스로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금세 탄로 날 구차한 거짓말, 억지 궤변, 심지어 국민 갈라치기로 분열을 선동하는 여론전까지 거리낌 없이 구사하는 걸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계엄 이후 첫 담화(12월 7일)에서 밝힌 "법적, 정치적 책임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다"는 윤 대통령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건 아니다. 탄핵소추의견서 수령 거부를 시작으로 모든 법적 절차를 무시한 버티기에 들어가 영장 불복과 적반하장 식 고발로 이어지는 '법꾸라지'의 최고 기술 등을 구사할 거라는 건 사실 오히려 예측 가능한 행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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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포비아' 매몰된 국힘
보수의 품격 대신 뻔뻔함 택해
'카터 법칙' 기대할 수 있을까
다만, 새해 첫날부터 극렬 지지자를 향해 "여러분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다"는 편지를 띄워 가뜩이나 분열과 갈등의 골이 깊은 이 나라를 더 갈가리 찢어놓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시민과 시민, 시민과 공권력, 공권력과 공권력이 충돌하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의 혼란과 불안을 가중해 대체 어떤 나라를 만들려고 하는지 윤 대통령과 그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묻고 싶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 모인 지지자들을 향해 띄운 편지. 윤 대통령은 "여러분과 함께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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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보수 정치는 때론 권위주의적인 기득권 세력이라 비판받았을지언정 최소한의 품격이 있었다. 당장은 억울할지 몰라도 나라가 결딴날까 두려워 국민이 꾸짖으면 본인의 부덕을 탓하며 일단 고개를 숙였다. 지지자를 방패 삼아 자기 정치적 잇속만 차리는 위선과 몰염치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 최소한의 선이 이번 계엄을 계기로 무너졌다.
이유가 있다. 계엄 직후부터 친윤 핵심인 권성동 원내대표는 “우리도 뻔뻔해야 한다"며 "권력을 잃었을 때 더불어민주당의 극악무도한 행태가 가속할 것”이라고 했다. 보수층의 '이재명 포비아'다. 이후 대통령과 여당의 행보는 딱 권 대표 발언 그대로였다. 권력의 반성 대신 대중 선동, 국정 안정을 바라는 국민 대신 혼란을 틈타 정치적 반전을 노리는 대통령 지키기, 침소봉대로 본질 흐리기, 과거 발언 뒤집기…. 아마 적잖은 보수 지지층이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게 도저히 표를 줄 수 없었던 바로 그 이유를 지금 보수를 참칭한 대통령과 국힘 의원들이 '이재명 포비아'를 무기 삼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
때마침 이재명 대표는 계엄 전 입법독주는 저리 가라 할 대권 탐욕 아래 탄핵에 탄핵을 거듭하는 헌정 농단 횡포를 일삼고, 무능한 공수처는 제 실력도 모른 채 무리한 수사 욕심을 부리며 수사기관끼리 조율도 안 하고 현직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에 나서 온갖 헛발질을 거듭한다. 이런 중구난방 덕에 위법한 계엄 발동이라는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탄핵 절차의 적법 논란만 남았다. 그 결과 정치에 과몰입한 양극단 세력은 사실상 정신적 내전을 치르고, 여기 속하지 않은 국민은 이 나라가 얼마나 더 망가질까 두려움에 떤다.
이러다 정말 나라 망하겠다는 공포에 휩싸이다, 문득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여야 불문 국민은 안중에 없이 나라가 만신창이가 돼도 자기 영달만 추구하는 정치인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기에 거꾸로 국민은 각성할지 모른다는 희망이 어렴풋하게나마 생겼기 때문이다.
마침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에서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최근 세상을 뜬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 빗댄 '카터 법칙(Carter Rule)'이다.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에선 근본적 변화를 이루려면 극심한 위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가령 1970년대 말 카터 정부의 무능에 대중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라 분노로 이어졌기 때문에 레이거노믹스의 번영이 왔다는 것이다. 더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악화했을 때 비로소 국민은 "이제 그만"을 외친다.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닐까. 상황이 좋아지기 위해 점점 더 나빠져 온 거라고 믿고 싶다.
안혜리 논설위원 |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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