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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목)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7] 천상의 빛과 지상의 빛이 공명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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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한 줄기

얼어붙은 호숫가

함께 빛나네

つきいちりんとうこいちりんひか

月一輪凍湖一輪光りあふ

빛도 파도의 형태를 띤다. 진동하며 움직인다. 밤하늘의 달도, 한겨울 얼어붙은 호숫가의 얼음도 모두 흔들리며 우리 눈에 들어온다. 눈이 시리도록 추운 겨울날, 나는 담요를 덮어쓰고 베란다로 나가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흔들리는 작은 별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내게로 달려온다. 까마득한 은하계에서부터 이곳에 서 있는 내게로 별빛이 올 때까지 몇 번의 파동을 거쳤을까. 그 힘과 에너지를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시간도 만만치 않게 들었을 것이다. 과거로부터 흘러오는 저 빛들이 나에게 무언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책상으로 돌아와 나의 빛 스탠드를 켠다. 글을 쓰기 위해서도 빛이 필요하다. 미래를 밝히기 위한 작은 의식이다. 몇 광년 전 출발한 별빛 입자가 지금 우리에게 닿는 것처럼, 글을 쓰거나 목소리를 내거나 이 땅에서 만들어내는 우리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다만 어떤 파동은 빨리 지쳐 사그라지고, 어떤 파동은 영원에 가깝게 날아가며 힘을 유지한다. 인간이 빛을 들 때, 그것이 얼마나 오래가느냐는 영혼의 고결함에 달려 있다.

하시모토 다카코(橋本多佳子·1899~1963)는 이 시를 쓸 때, 나가노현의 큰 호수인 스와호를 보고 있었다. 밤이었고, 한겨울이었다. 휘영청 밝은 달이 얼어붙은 호숫가에 빛을 뿌리고 있었고, 호수의 얼음 알갱이들이 은빛 거울처럼 달빛의 입자를 반사하고 있었다. 천상의 빛과 지상의 빛이 공명하는 순간, 겨울 호숫가에 선 시인은 죽은 친구를 떠올렸다. 불과 몇 주 전에 함께 이 호수를 보러 오기로 약속했는데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실제로 이 시는 시인이 그 사람의 영결식에서 영전에 바친 추모의 시다. 원래는 ‘달빛 한 줄기 얼어붙은 호숫가 너는 없구나’였지만 벗을 떠나보내는 슬픔과 무상함을 가슴에 묻고, ‘너는 없구나’를 ‘함께 빛나네’로 바꾸었다. 상실의 아픔은 빛으로 승화되었다. 애도의 빛, 추모의 빛이다.

세계가 놀란 빛의 파도가 대륙의 동쪽 끝, 동아시아의 작은 반도 끝에서 너울대는 요즘이다. 나의 일본 친구들은 너희의 아름다운 시위를 보았고 응원한다는 연하장을 보내왔다. 바깥에서도 다들 조용히, 그러나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특히 한 친구는 눈 내리는 밤, 은빛 코트를 입고 거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고 했다. 얼마나 추웠을까요, 라면서. 광장의 흔들리는 빛. 그것은 미래의 빛과 과거의 빛이 공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다른 말로 역사라고 부르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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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윤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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