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5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잠시 눈을 감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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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은 4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5차 변론에서 “이번 사건을 보면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뭐 지시를 했니, 받았니, 이런 (증인 신문의) 이야기들이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달그림자 같은 걸 쫓아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비상계엄 당시 국회의원을 체포하고 의사당에서 끌어내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며 자신의 내란 혐의를 에둘러 부인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 기소된 윤석열 대통령의 공소장을 보면, 지난해 내내 머릿속으로 비상계엄을 구상했던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공허한 ‘호수 위 달 그림자’로 보입니다. 공소장에는 그가 대국민담화에서 국민께 사과하며 머리를 숙인 뒤 소통이나 쇄신, 서민의 삶 등을 강조하면서도 사석에선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과 비상계엄을 구상한 정황이 곳곳에 드러납니다.
사과·쇄신 다짐한 뒤에도 ‘계엄’ 논의
공소장을 보면 윤 대통령은 지난해 11월9일 국방부 장관 공관에서 김 전 장관,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 등과 만나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특별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취지로 비상계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이틀 전인 11월7일 윤 대통령은 대국민담화에서 “저와 정부의 부족했던 부분을 잘 알고 있다. 고칠 부분은 고치겠다”며 “국민 여러분의 뜻은 겸허히 받들어서 국민을 섬기는 마음으로 쇄신에 쇄신을 기해 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명태균씨 관련 의혹, 김건희 여사 논란 등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듯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제 부덕의 소치다.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 진심 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취임 이후 처음으로 고개를 숙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지 언급 없이 “어찌 됐든 사과드린다”고 해 비판이 일었지만, 당시 대통령실 참모들은 대통령의 사과에 크게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이틀 뒤에 계엄을 논의한 정황을 보면 당시 그의 사과와 쇄신에 대한 다짐은 빈껍데기 언사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7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열린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에서 고개 숙여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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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대신 ‘군이 나서야 되지 않느냐’
윤 대통령은 4·10총선을 앞둔 지난해 3월말~4월초 사이 어느날, 서울 종로구 삼청동 대통령 안가에서 김 전 장관(당시 경호처장), 신원식 당시 국방부 장관, 조태용 국가정보원장, 여 전 사령관 등과 밥을 함께 먹으며 시국 상황에 대한 걱정과 함께 ‘비상대권을 통해 헤쳐나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군이 나서야 되지 않느냐, 군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지로 말했다고 공소장은 적시합니다.
당시는 김 여사 명품가방 수수 의혹, '채상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 핵심 피의자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주오스트레일리아(호주)대사 임명 논란, 의대 증원 갈등, ‘대파 875원’ 발언 논란 등 윤 대통령이 자초한 문제들로 여당의 총선 전망이 어두울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대통령실 참모들은 야당이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언론 등이 문제라고 책임을 돌리며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습니다. 비상대권 발동을 구상하던 윤 대통령의 인식이 대통령실의 대응에서도 자연스레 드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공소장을 보면, 여당이 총선 참패로 싸늘한 민심을 확인한 뒤인 5~6월 중 어느날, 윤 대통령은 김 전 장관, 여 전 사령관과 저녁식사를 하며 ‘비상대권이나 비상조치가 아니면 나라를 정상화할 방법이 없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나옵니다. 여당 총선 패배 뒤 비서실장과 수석 비서관을 교체하며 인적 쇄신을 하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처음으로 일대일 회담(4월29일)을 하는 등 겉으로는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는 듯 했지만 머릿속에는 비상계엄만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양극화 타개는 보여주기?
중남미 순방을 다녀온 뒤인 지난해 11월22일 윤 대통령은 “양극화 타개로 민생 활력을 살려 새로운 중산층 시대를 열겠다”고 임기 후반부 국정 목표로 불쑥 ‘양극화 타개’를 꺼냅니다. 당시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구호만 던진 양극화 타개의 구체적인 내용을 부랴부랴 만들겠다고 팔을 걷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윤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겨냥한 명태균씨 공천개입 의혹 제기, 감사원장 탄핵 추진 등 야당의 공세를 ‘패악질’로 보고 이를 막으려는 생각이 가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소장에는 윤 대통령이 양극화 타개를 이야기한 이틀 뒤인 11월24일 한남동 관저에서 김 전 장관과 차를 마시며 ‘정말 나라가 이래서 되겠느냐’,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겠다’, ‘국회가 패악질을 하고 있다’ 등의 이야기를 하며 비상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나옵니다. 양극화 타개를 위해선 입법과 예산 반영 등 야당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협치에 대한 구상 대신 ‘패악질 하는 야당’에 대한 ‘응징’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윤 대통령이 12월3일 위헌·위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로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기며 ‘양극화 타개’ 역시 공허한 ‘달 그림자’로만 남게 됐습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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