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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순수한 시절로 나를 데려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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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로티

동대문운동장 인근은 한국이었지만 또 한국 같지 않았다. 여전히 낯설고 들어가면 늘 길을 잃고 마는 DDP 건물 옆으로 ‘중앙아시아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리가 이어졌다. 연휴였고 한민족과 비슷한 얼굴을 한 ‘스탄’국(國) 남녀가 말끔하게 차려입고는 그 좁은 골목을 누볐다.

가려고 한 곳은 태국 디저트를 판다는 ‘져니 로띠’였다. 이 집은 작은 인쇄소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충무로의 교차로 한편에 알아볼 수 없는 태국어 간판을 달고 있었다. 대로변에 나 있는 가게 정면으로 주방 창이 뚫려 있었다. 주인장은 좁은 주방에서 밀가루 반죽을 얇게 풀어 프랑스 크레프를 굽듯이 태국 디저트 ‘로티’를 부치고 있었다.

서울 오장동 ‘져니 로띠’의 바나나로티(아래)와 타이브런치.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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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우연히 알게 됐다. 저녁 약속을 마치고 달리던 택시 안에서 이 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차 안에서 간판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태국 디저트’라고 쓰인 영어는 눈에 금방 들어왔다. 태국에는 똠양꿍과 팟타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섬처럼 한반도에 갇혀 있는 한국과 달리 태국은 인도와 인도네시아, 동남아를 연결하는 한복판에 있다. 덕분에 민족 구성도 다양한 편이고 그만큼 음식도 여러 나라 문화가 섞여 있다. 애초에 ‘태국을 볶다’라는 뜻으로 근대에 국가 주도로 조리법이 완성된 팟타이는 무쇠 팬을 강한 열로 빠르게 볶는다는 조리 기법 측면에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음식이다. 역시 일명 ‘보트 누들(Boat Noodles)’이라고 불리는 태국 쌀국수는 1890년 ‘랑싯 운하’ 착공과 함께 중국인 노동자들이 들여와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반면 밀가루 전병을 튀기듯 얇게 부쳐 달걀·바나나·땅콩 등 고명을 올리고 연유를 쳐서 달달하게 먹는 디저트 로티(roti)는 출신이 인도다. 17세기 인도계 이민자들이 가져와 20세기 팟타이를 비롯해 관광 음식들이 개발되던 시절 로티도 함께 대표 길거리 음식으로 부상했다. 특히 태국 현지화를 거치면서 인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달고 섬세한 스타일로 변해 갔다.

서울 오장동 ‘져니 로띠’.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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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태국에서 직접 로티를 배워왔다는 젊은 사장과 태국인으로 보이는 종업원 한 명이 손님을 맞았다. 주인장이 태국에서 찍은 사진들이 주방 한쪽에 붙었고 태국 포스터가 또 다른 벽을 장식했다. 모양이 서로 다른 테이블과 의자를 보니 주인장이 직접 하나하나 사들인 것 같았다. 사실 이런 집은 호기심이 금방 생기다가도 한편으로는 쉽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이국적인 아이템을 골라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는 받쳐주지 못하는 실력에 금세 사라지는 모습을 많이 봤던 탓이었다. 주문을 넣고 절반은 설레는 마음으로, 또 나머지는 걱정으로 음식을 기다렸다. 음식은 곧 나왔고 걱정도 금방 사라졌다.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바나나 로티’는 푹 익힌 바나나를 얇고 바삭한 로티 안에 넣고 포장을 하듯 조심히 접어 부쳐 냈다. 연유를 듬뿍 뿌렸기에 반죽이 축축해지기 전, 금방 집어 먹는 게 포인트다. 살얼음이 깨지듯 아삭아삭 깨지는 로티의 식감은 태국 길거리에서 먹던 것과 거의 비슷했다. 단지 그때는 말 대신 손가락으로 간신히 주문을 넣었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복잡한 요청도 어깨 한번 으쓱하고 금세 해치우는 주인장이 앞에 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신맛이 전혀 없는, 순수한 단맛이 아이의 철없는 웃음처럼 저항감 없이 몸속으로 녹아내렸다. 마음속으로는 ‘아, 달다’를 외쳤다. 그러나 젓가락은 또 다음 조각으로 향했다.

서울 오장동 ‘져니 로띠’의 바나나로티(오른쪽)와 타이브런치.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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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음식이란 자고로 이랬다. 근엄하게 건강이란 이름으로 성적표 검사하듯 영양소를 따지지 않았다. 대신 한여름 물장난을 치며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물에 흠뻑 젖어도 그저 깔깔거리듯, 그렇게 먹는 음식이란 또 따로 있는 것이다. 옥수수와 치즈를 넣어 구운 로티는 재잘거리듯 고소한 맛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타이 브런치’라고 하여 계란프라이와 바나나, 태국 소시지, 콘샐러드 등이 한 접시에 올라온 음식은 또 제법 어른스러운 모습이었다.

매콤하게 향이 풍기는 태국 소시지를 먹고 자리에서 나올 땐 밖으로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짧은 여행을 떠나려는 것 같았다. 낯선 곳에서 발견하는 익숙한 맛, 그리고 다정한 미소가 주는 안도감이 있다. 접시 하나를 두고 한 나라를 추억하고 오래된 기억을 꺼낼 수 있는 힘이 음식에 있다. 그날 둥그런 철판에 부쳐낸 로티 한 조각은 나를 멀고 오래된 곳으로 데려다 줬다.

#져니 로띠: 바나나로티 5500원, 옥수수치즈로티 6500원, 타이브런치 1만2500원. (전화번호 없음)

서울 오장동 '져니 로띠'는 대로변에 있는 가게 정면으로 주방 창이 뚫려 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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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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