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의 결정에 승복하겠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대통령 탄핵심판 최종(11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최종의견을 진술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5.2.25/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지난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됐다. 탄핵 주요 사유는 대통령이 선거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 하고 싶다" 등 노 대통령의 발언을 야당은 문제 삼았다.
최종 변론 이후 14일 뒤인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소추안이 기각돼 노 대통령은 복귀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재판관 9명 가운데 3명 인용, 5명 기각, 1명 각하였다.
당시 TV로 노 대통령의 탄핵 기각 과정을 지켜봤다. 20대 초반이었던 필자는 법 전공자가 아닌 데다 현직 대통령 최초의 탄핵 심판이라 배경지식이 부족했다. 그러나 자주색 법복을 입은 윤영철 헌재소장이 차분한 어조로 읽던 '결정문' 가운데 다음 대목은 귓가에 울렸다.
그 순간 헌법의 의미와 무게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했다. '아, 법률 위에 헌법이 있구나. 헌법에 위반되면 대통령이 파면될 수 있구나.'
당시 사회부 사건팀 기자였던 필자는 헌재를 에워싼 박 대통령 지지자들을 취재했다. '충돌 중심으로 즉각 보고하라'는 선배의 지시를 휴대전화로 확인한 순간, 어디서 '쿵' 소리가 들렸다. 70대 남성 김 모 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김 씨의 얼굴색은 퍼렇게 변해갔다. 그때, '이 사람은 곧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병원으로 이송된 김 씨는 끝내 숨을 거뒀다.
김 씨는 60대 A 씨가 탈취해 차 벽을 들이박으려고 질주했던 경찰 버스와 충돌한 소음 관리 차량에서 떨어진 철제 스피커를 맞아 사망했다. A 씨는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였다. 이날 김 씨를 포함한 4명이 숨졌다. 대낮 헌재 앞 시위대에게 경찰관들이 맞았고 기자들이 맞았고 경찰관과 기자로 오해받은 시민들도 맞았다.
악몽 같던 현장에서 벗어난 후에도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뜬눈으로 밤새고 나면 '법률 위 헌법을 위반해 대통령이 파면됐는데 왜 일부 사람들은 납득하지 못할까'하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헌재와 헌법의 권위를 흔들어 그 결정을 의심케 했던 탄핵 반대 주최 측이야말로 끔찍한 폭력 사태의 주범이었다.
헌재는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에 따른 헌법 개정의 산물이다. 1988년 9월 1일 개소 후 36년 6개월 동안 위헌법률심판 등 5만 1497건을 처리했다. 특히 사회보호법에 따른 무조건 감호(1989년 7월)와 신행정수도법(2004년 10월), 간통죄(2015년 2월)는 위헌이라고 판단했고 2014년 12월 통합진보당에는 해산을 명했다.
헌재의 선고는 시대를 앞서나가 우리 사회의 가야 할 길을 제시하기도, 시대를 따라가지 못해 우리 사회를 주저앉히기도 했다. 다만 어느 쪽의 결정이든 시대의 나침반 역할을 했으므로 부정할 수 없었다. 윤 대통령 측은 앞서 탄핵 선고와 관련해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겠다'(지난 2월 19일, 기자간담회)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아직 윤 대통령이 본인의 입으로 '승복'을 언급한 적이 없다. 이참에 윤 대통령이 직접 헌재 결정 승복 메시지를 내는 건 어떨까. 그것은 비상계엄 사태 후 가장 대통령다운 모습이 될 것이다.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