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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기대했지만 엄마는 그림책을 사 주었다. 시무룩해진 아이를 보며 엄마는 약속한다. “다음 생일엔 자전거 사 줄게.” 아이는 이 말을 믿고 분을 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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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은 말하는 사람이 스스로 청구하는 구속 영장. 자신을 옭아매는 포승줄. ‘봄볕이 참 좋다’ ‘이 옷 마음에 들어’ ‘창문을 열라’처럼 감상과 진술과 명령으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말이 내 밖의 무엇에 대한 표명이라면, 약속은 나를 겨눈다. ‘지킬 거야, 어길 거야!’
약속은 취약하다. 약속은 지금 하지만 그 이행은 늘 미래의 일. 말과 행동 사이에 놓인 이 ‘시간차’는 우리를 쉽게 ‘약속 파기’로 이끈다. ‘맹약’이니 ‘굳은 맹세’니 하며 요란을 떨고, 그것도 모자라 연대 보증을 세우고 담보를 설정하고 서약서를 내밀어 봤자 약속 이행은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니 ‘믿음직한 약속’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깨진다.
그래도 약속은 강하다. 약속은 약속하는 사람 스스로 도덕적 존재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윤리적 헌신에 대한 다짐을 바탕으로 한다. 약속은 전적으로 약속하는 사람의 몫. 그것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맺어지지만, 그 책임은 전적으로 말하는 사람에게 있다. 그렇다면 약속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데, 그 신뢰는 오직 말에 대한 신뢰이다. 약속이 촘촘할수록 우리는 행동을 스스로 제약하면서 사회를 ‘약간이나마’ 예측 가능하게 만든다.(허무하게 무너지기를 거듭하지만)
약속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 그래서 묻는다. 우리는 어떤 약속의 징검다리를 놓아 이 폭력의 시대를 건너갈까. 우리에게 남은 거라곤 서로에 대한 약속밖에 없는데. 말밖에 남은 게 없는데.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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