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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일)

정치과잉 시대에 돌아본 퇴계의 처세술 [인문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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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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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이 기록한 퇴계의 연보에 따르면, 퇴계는 관직에 있는 동안 정치의 잘잘못을 거리낌없이 말했다. 입에 담기 조심스러운 국왕의 측근과 외척에 관한 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관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달랐다. 스승의 영향인지 유성룡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남의 잘못을 말하지 말고 정치의 잘잘못을 말하지 마라"고 강조했다. 퇴계의 또 다른 제자 배삼익도 자식들에게 "요즘 젊은이들은 조정의 잘잘못 따지기를 좋아하여 선비들까지 당파를 만드니 너희들은 그러지 마라"고 당부했다. 퇴계의 수제자 조목 역시 만년에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정치 얘기는 입에 담지 않았다. 하루는 조정 관원이 찾아와 정치 얘기를 꺼내자 일갈했다. "산 속에선 산 속에 맞는 얘기를 해야지!"

정치 얘기를 꺼린 건 퇴계 제자만의 특징일까. 그렇지 않다. 율곡 이이도 '격몽요결'에서 말했다. "친구와 함께 있을 때는 세속의 더러운 얘기, 정치의 시비, 지방관의 능력, 타인의 잘못은 입에 담지 마라." 율곡의 후계자를 자처한 송시열도 마찬가지였다. "선비가 모이면 공부 얘기를 하고, 농부가 모이면 농사 얘기를 해야 한다. 함부로 정치의 잘잘못을 따지고 남의 장단점을 말한다면 큰 잘못이다."

이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누구보다 정국의 동향을 주시하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그런데 사석에서 정치 얘기를 금기시한 이유는 뭘까. 잘못 엮이면 목숨이 위태로워서일까? 아니다. 그것이 매너였기 때문이다. 정치 얘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는 일화는 인물 전기에 미덕으로 언급된다. 자손에게 남긴 가훈에도 자주 보인다. 정치 참여는 지식인의 책무다. 다만 지나치게 집착하면 문제다.

탄핵 정국이 길어지면서 진영 간 갈등이 격렬해지고 있다. 너도나도 정치 얘기뿐이니, 한마디 보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여럿이 모인 자리나 단톡방에서 뜬금없이 정치 얘기를 꺼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가짜뉴스와 집회소식을 SNS로 퍼 나르기 바쁘다. 자신이 '깨어있는 시민'이거나 '계몽된 자'라는 사실을 알리지 못해 안달이다. 혼자 깨어있고 혼자 계몽되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까지 그렇게 만들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정치에 관심을 끄라는 말이 아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라는 말이다. 정치 얘기는 입에 담지 않는다. 정치과잉 시대를 살아가는 처세술이자 에티켓이다.
한국일보

장유승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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