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낡은 건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때, 이게 곧 위기다. 이 과도기(interregnum)엔 많은 병적 증상들이 생긴다.”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의 ‘옥중수고’다. 그는 1920년대 이탈리아 파시스트(무솔리니)에 저항하다 20년 이상 징역형으로 1926년에 투옥됐다. 오랜 옥살이와 치열한 글쓰기로 심신이 고갈됐다. 10여년 수인(囚人) 생활 끝에 풀려났으나, 얼마 안 돼 사망했다. 46살!
그와 비슷한 때를 더 짧게 산 안중근(1879~1910)은 1909년 10월26일, 동료 결사대와 만주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군 헌병에게 잡혀 일제 총영사관으로 이송됐고 재판을 받았다. 1910년 2월14일, 사형 선고됐다. 이에 어머니 조마리아(1862~1927)가 이런 편지를 쓴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걸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간담이 서늘하다. 어떤 어머니가 사형을 언도받은 자식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대다수 부모는 사돈의 팔촌의 고교 동기동창의 일가친지까지 샅샅이 뒤져, 또 숟가락이나 반지 등 그 모든 재산을 털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한다. 그 목숨만큼은 구하려고! 그러나 조마리아는 냉정하고 비장하고 초연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어머니는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다.
과연, ‘견리사의 견위수명’, 즉 “(코앞) 이익을 보면 그게 과연 옳은 건지 잘 따져보고, (나라가) 위태로운 걸 보면 기꺼이 목숨을 바쳐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 대인 안중근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그는 선고 후 약 40일 뒤(3월26일), 사형됐다. 31살!
100년 전 인물들을 굳이 기억하는 까닭은, 2025년 지금도 ‘낡은 건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아’ 다양한 위험과 기회가 교차하는 ‘위기’의 시간이기 때문! 원래 그람시가 말한 ‘과도기’(인터레그넘)란, 고대 로마에서 기존 주권자(황제)의 정치적, 법적 효력이 종말을 고했으나 아직 마땅한 계승자가 등장하기 이전이다. 이때 ‘많은 병적 증상들’이 나오는 것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백화제방의 시기이기 때문!
세계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사실상 파산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멸망을 두려워한 자본-권력-보수 진영은 온갖 빚잔치(‘신용’경제) 내지 ‘아랫돌 빼내 윗돌 괴기’ 수법으로 응급처치를 했다. 그 뒤 한편에선 인공지능(AI)이나 생명공학, 군수산업과 전쟁 등 부단히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려 하고, 다른 편에선 해고, 장시간 노동, 현대판 노예노동 등을 통해 노동의 마지막 불꽃까지 삼키려 든다. 그 와중에 자유민주주의나 복지사회, 생태전환 등은 뒤로 밀리고, 인종차별, 이주민·난민 혐오, 극우 선동, 파쇼적 권위주의 등이 앞다투어 창궐한다.
윤석열과 국민의힘 중심의 12·3 내란, 극우 세력에 의한 서울서부지법 폭동, 뒤이은 윤석열의 탈옥(?) 작전 등은 (안 그래도 반주변부 자본주의에 불과한) 대한민국의 ‘위기’를 거칠게 드러냈다. 100년 전 그람시의 말처럼 ‘낡은 건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때가 위기’임이 실감 난다. 이 과도기엔 많은 ‘병적 증상’이 나온다. 시대착오적 검찰 제왕과 ‘계몽령’이 그 증거! 그래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웠다.
이제 물어야 한다. 과연 어떤 세상이 새로 와야 하는가? 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과연 낡은 세상, 즉 윤석열과 국민의힘의 세상은 어떤 것이었나 좀 더 명확히 하자. 내가 보기에 일제 이후 최근까지 윤석열과 국민의힘의 세상은 기득권의 세상, 상품-화폐의 세상, ‘강자 동일시’의 세상, 탐욕과 기만의 세상이었다. 안중근이 목숨 걸고 없애려 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세상도 그것! 즉,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만 겨눈 게 아니라, 그가 표상한 낡은 세계까지 겨누었다. 그렇다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안중근은 물론 그 어머니 조 여사는, 그리고 그들과 뜻을 함께한 투사들은 과연 어떤 세상을 갈망했을까? 그리고 그런 소망은 오늘의 우리와 어떻게 이어져 있을까?
이런 식의 질문과 토론, 최선의 해답을 위해 우리는 ‘과도기’의 혼란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적극 환영해야 한다. 물론, 거짓과 증오, 폭력과 조작은 금물! 비폭력의 열린 대화는 비록 겉으로는 혼란한 야단법석 같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만드는 과정이다. 민주주의를 특정한 ‘제도’나 특별한 ‘인물’로 고착시키지 않는다면, 즉 민주주의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지난한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여기저기 살아 있는 목소리들이 분출하는 걸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오히려 침묵과 굴종, 거짓과 조작이 더 두렵다!
12·3 내란에 부당하게 동원된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과 그 아내 역시 굴종과 거짓에 저항했다. 온갖 회유나 협박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계엄군으로 국회에 들어간 것은 잘못됐다” “잘못한 것이니 벌은 당연히 받아야 한다” “남편의 명령으로 들어간 부하를 위해서라도 다 책임진다고 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곽종근과 그 아내를 보니 안중근과 그 어머니가 떠올랐다.
내 생각에, 앞으로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더 이상 기득권의 세상, 강자 동일시의 세상, 탐욕과 기만의 세상이 아닌, 기득권 자체가 없는 세상, 개성과 역량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는 세상, 나눔과 돌봄의 세상이다. 이제는 ‘많이 먹고 많이 싸는’ 세상이 아니라 ‘조금 먹고 조금 싸는’ 세상, 더 이상 ‘많이 일하고 많이 쌓는’ 세상이 아니라 ‘즐겁게 일하고 많이 나누는’ 세상이 돼야 한다. ‘탈(脫)자본, 진(進) 생명’이 참된 가치다.
조마리아는 아들 안중근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여기에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다시 재회할 것을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수의(壽衣) 입은 안중근과 그 ‘다음 세상’, 이것이 오늘 우리의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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